[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뻘>을 보고 있자니 평행이론이 떠오른다. 무수히 많은 세계가 병렬로 존재한다는 평행이론 말이다.
<뻘>은 1981년 전라남도 벌교를 무대로 삼는다. 질퍽질퍽한 벌교 뻘 바닥을 배경 삼아 여러 가지 시대적 고민들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채 서로 뒤엉킨다.
극작 모티브인 1890년대 안톤 체홉의 희곡 <갈매기> 속 세대간 갈등, 1980년 제5공화국 군부세력에게 무참히 짓밟힌 광주의 상처, 그리고 현재 정권의 재갈물림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현대사로 인해 민초들의 삶의 터전인 갯벌에는 쉴새 없이 구멍이 난다.
극은 80년 광주와 81년 벌교의 모습을 다루는데, 흥미롭게도 광주가 아닌 벌교에 무게중심을 둔다. 뜨겁고 아렸던 80년 광주로부터 한 발 비켜서 있는 셈이다.
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꼴라주 형식으로 펼쳐지는 1막에서만 그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록음악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문어대가리’라고 조롱 받는 권력 실세의 그림자는 군홧발 소리, 총소리와 함께 무대 뒤 스크린에서 흑백으로 스쳐 지나간다. 벌교 사람들은 그저 갯벌, 지하공장, 자취방, 교실 등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 외지 사람과의 편지나 전화를 통해 광주 소식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 연극 <뻘>에는 시대와 삶의 흔적이 담긴 다양한 노래가 등장한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하지만 이어지는 81년 벌교의 모습은 80년 광주의 상흔이 이곳 갯벌 사람들에게까지 깊게 새겨졌음을 알린다. 사회적 이슈를 피상적으로 접하면서도 현대사의 상처를 피하지 못하는 벌교 사람들은 어쩐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두산아트센터 창장자육성 프로그램 지원 작가인 김은성은 “시대의 궤적을 되짚어봄으로써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오늘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가가 빚어낸 촘촘한 서사와 더불어 벌교 꼬막처럼 감칠맛 나는 사투리 덕분에 1막의 변칙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극은 사실주의적으로 느껴진다. ‘노래가 뭣이간디’ ‘내가 미싱인지 미싱이 난지 모르겄네요’라고 읊조리는 민초들의 대사에 애틋함을 느끼다가도, 이내 육탄전과 육두문자를 주고받는 해학적 장면에서는 실소가 흘러나온다. 초반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몇몇 배우들의 사투리도 시간이 흐를수록 차차 무르익는다.
작 김은성, 연출 부새롬, 출연 선종남, 추귀정, 윤상화, 이지현, 김종태, 강말금, 이수현, 전석찬, 유제윤, 신정원, 배선희. 7월 28일까지 두산아트센터. 티켓가격은 3만원. 문의 708-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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