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하청 노동자들의 비극은 우연이 아닌 구조의 산물입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 내 ‘위험의 외주화’ 현상, 즉 정규직 엔지니어보다 하청업체 노동자의 산재 발생 위험이 높은 이유로 △위험 업무 전가 △정보 불균형 △숙련도 부족 △산재 은폐 기제 등을 꼽았습니다. 한국은 대규모 반도체 팹(Fab) 내에서 유지보수, 화학물질 관리 등 위험 작업이 하청업체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뉴스토마토>가 만난 산재 피해자들도 모두 세정, 유지보수, 폐기물 처리 등 독성 물질 노출 위험이 큰 작업을 맡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산업재해조사 대상 제조업 노동자 사망 현황.(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하청노동자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삼성전자의 ‘202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재해로 하루 이상 근무 손실이 발생한 환산 재해율(LTIR, Lost-Time Injuries Rate)은 본사 정규직이 0.022%인 반면, 국내 상주 협력사는 0.035%로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대규모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의 상당수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김주영 의원(더불어민주당·김포시갑)이 고용노동부를 통해 받은 ‘2022~2025년 3분기 재해조사 대상 제조업 사망사고 현황’ 자료를 보면, 2024년 산업재해 사망자 175명 가운데 하청 노동자는 98명으로 56%를 차지했습니다. 10명의 노동자 중 6명이 하청 근로자인 것입니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도 하청노동자 비율은 34.4%에 달했습니다.
또한 하청노동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모른 채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원청이 화학물질의 구체적 정보(명칭, 함유량) 등을 공개하지 않는 데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의 유해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 인터뷰한 노동자들 모두 자신이 어떤 물질을 다루는지 회사는 알려준 적이 없다며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청업체의 높은 이직률과 짧은 근속기간도 안전 숙련도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등 산재 발생율을 올리는 원인입니다. 하청노동자들 상당수가 하청업체 여러곳을 옮겨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집계한 반도체 기업 업무상 질병 산재신청 및 승인 현황.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하청노동자에게는 재계약 불이익을 우려해 가벼운 사고는 산재 처리를 하지 않는 ‘산재 은폐’ 가능성도 상존합니다. 피해를 호소한 3명의 노동자들도 퇴사한 이후에야 산재 신청에 나설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원청의 산재 신청 현황을 하청과 비교하는 과정에서도 확인됩니다. 김주영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제출받은 ‘반도체 사업장 근로자 산재 신청’을 보면, 지난해에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에서 총 41건의 산재 신청이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산재 신청 건수는 전년도(23건)에 견줘 78% 증가한 수준입니다. 반면, 같은 공정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의 산재 신청 현황은 집계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업체가 산재해 있어 파악이 어려운 탓이지만, 더 취약한 지위에 있는 하청노동자들이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하청노동자들은 역학조사 대상에서도 포함되지 못합니다. 2019년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발표한 ‘반도체 노동자 건강상태 10년 추적조사’조차 원청 정규직 위주로 진행돼, 가장 위험한 공정에 투입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통계에서 제외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김 의원은 “제조업 사망사고에서 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여전히 높고, 화학물질 누출과 같은 고위험 사고도 반복되고 있다”며 “산업재해 예방과 안전관리 체계가 고용구조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근본적인 고용구조 개선과 함께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