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산업재해 소송에서 판사가 의학적 판단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의사의 소견을 묻는 진료기록 감정(鑑定)은 재판의 필수 절차가 됐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기다리는 사이 소송이 지연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변호사 비용은 물론 수백만원의 감정 비용까지 부담해야 합니다. 소송 지연과 비용 부담에 지쳐 소송을 포기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입니다. 법조계에선 법원이 진료기록 감정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산재보험 제도 취지에 맞는 규범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과거엔 아니었는데…감정 신청, 산재 소송서 절차상 관행돼"
진료기록 감정은 산재 소송 때 재판부가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 즉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고자 의사에게 의견을 구하는 증거조사 방법입니다. 법조계에 따르면, 산재 소송의 특성상 감정은 대부분 '입증 책임'이 있는 원고(노동자) 측이 신청합니다. 재판부가 감정의 필요성이 인정할 경우, 법원은 등록된 '전문의 풀(pool)' 가운데 신청받은 과목의 전문의를 무작위로 선정해 감정을 의뢰합니다. 감정을 맡은 감정의(鑑定醫)는 진료기록과 노동자 측 질의서, 업무환경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해 감정서를 만든 후 재판부에 제출합니다.
진료기록 감정은 말 그대로 참고자료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사실상 소송 결과를 좌우하는, 판사의 판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입니다. 실제로 <뉴스토마토>는 10일자에 보도한
(불합리한 산재 판정)(단독)①의사 한마디에 '산재 판결' 갈린다 기사에서 한 산재 전문 변호사의 발언을 인용해 "감정의 소견과 반대되는 판결을 거의 못 봤다"며 "(산재 소송을) 수백 건 했는데 (감정의 소견과 다른 판결은) 1건 정도다. 체감상 99% 이상"이라고 라고 전한 바 있습니다. 또 11일자
(단독)②산재 변호사 10명 중 9명 "소송서 '진료기록 감정' 영향력 축소돼야" 기사를 통해 보도한 것처럼 산재 전문 변호사 30명 중 15명(50%)은 '판사가 진료기록 감정을 먼저 권하거나 신청하도록 지휘하는 사건의 비율'이 '80% 이상'이라고 답변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임자운 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는 "대다수 재판부가 첫 재판 전에 '감정 신청하라'라고 석명한다"면서 "사건 기록을 보기도 전에 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 15년 전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백혈병 사건을 진행될 때만 하더라도 이런(감정이 필수가 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과거에는 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감정을 진행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이 관행처럼 굳어져서, 도리어 감정이 왜 부적절한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심지어 감정 절차가 관행처럼 굳어진 탓에 노동자 측이 알아서 먼저 신청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박다혜 법률사무소 고른 변호사는 "감정이 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감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을 주는 판사가 거의 없어서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신청한다"며 "감정이 절차상 관행으로 형성돼 버렸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산재보험 6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지난해 6월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건강한노동세상, 노동건강연대 등 노동단체 회원들이 산재보험 개혁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재 전문 변호사 30명 중 29명 "감정 늦어져서 소송도 지연"
산재 소송 때 진료기록 감정이 필수 절차로 여겨지면서 소송도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뉴스토마토>가 지난 4월17일부터 5월8일까지 산재 전문 변호사 3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진료기록 감정 회신이 현저히 늦어져 산재 소송 재판이 통상적인 진행보다 지연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중 무려 96.7%(29명)가 '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없다'는 응답은 3.3%, 단 1명에 불과했습니다.
'산재 소송이 감정 절차를 거칠 경우, 처음 소송이 제기되고부터 종결될 때까지 통상 걸리는 시간'을 묻자 응답자 중 53.3%(16명)는 '1년 이상 1년 6개월 미만'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어 △1년 6개월 이상~2년 미만은 36.7%(11명) △2년 이상~2년 6개월 미만은 6.7%(2명) △2년 6개월 이상은 3.3%(1명) 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감정 절차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법원에 등록된 감정의 숫자가 적습니다. 감정의는 주로 대학병원 교수들이 맡습니다. 그런데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삼성서울병원·고대안암병원 등 일부 대학병원은 감정의 풀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감정의 풀로 등록된 의사도 1432명인데, 과목이 4~5개씩 중복됐습니다. 실제 감정의 숫자는 더 적은 겁니다. 특히 일과 건강의 영향을 연구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는 적고, 특정 질병에 관한 치료에 중점을 둔 임상과 전문의 숫자가 많습니다.
감정의의 업무 부담과 비용 등 현실적 문제도 있습니다. 업무 관련성은 방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도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감정의에 지급되는 비용은 감정 1건당 60만원입니다. 한 산재 전문 변호사는 "대학병원 교수에게 60만원은 큰돈도 아닌데 굳이 시간을 투자해서 (감정을) 빠르게 처리할 이유가 없다"며 "1년 동안 감정 촉탁을 가지고만 있다가 법원이 재촉하면 그제야 반송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윤석열정부의 의정 갈등 국면에선 인력 부족 문제까지 겹치면서 감정으로 인한 소송 지연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한 산재 전문 법무법인 대표변호사는 "4~5번 반송은 기본이었다"며 "전공의 파업으로 교수들이 당직까지 서면서 9~11번까지 반송됐다. 그 때문에 감정하는 걸로만 1년이 지나갔다"고 말했습니다.
'감정의 여건' 배려한다며 감정비 인상?…노동자 두 번 '울려'
법원은 감정의의 업무 부담과 적은 비용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올해부터 감정비를 120만원으로 올렸습니다. 기존 감정 1건당 60만원보다 2배가 는 겁니다. 질문이 20개를 넘어가면 추가 비용도 지불해야 합니다. 감정 비용은 감정을 신청한 사람 몫인데, 노동자에겐 엄청난 부담입니다. 한 산재 전문 변호사는 "원고가 감정 신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패소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신청한 감정 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 최소 240만원이 드는 셈"이라며 "여러 곳에 감정을 보내야 할 경우 감정비만 300만~400만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산재 소송을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한 산재 전문 법무법인의 대표는 "비용이 부담돼 추가 질의는 생각도 못 한다. 이상한 감정이 와도 그냥 넘어가야 한다"며 "변호사 상담 과정에서 감정 비용을 듣고선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어 "산재 소송의 원고는 일하다 다쳤으니까 생계비가 없는 사람이 많다. 변호사 착수금은커녕 인지대·송달료도 없는데 감정 비용까지 내라는 건 소송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산재 변호사는 “조정기일 때 감정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도 쟁점이 된다. 최근 근로복지공단에선 조정 권고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판사도, 의사도 감정 비용 부담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법조계 "감정, 필요 최소한으로 줄여야"
법조계에서 불필요한 감정을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박다혜 변호사는 "산재 소송은 원고의 질병이 의학적으로 직업병에 해당하는지가 아니라, 사회보험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질병 여부를 묻는 과정"이라며 "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질병 판단이 훨씬 넓은데 의학적 소견을 기계적으로 묻는 절차적 관행이 형성된 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최종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변호사는 "기저질환이 있더라도, 업무상 질병 인정에 관한 고용노동부 고시 기준에 조금 못 미치더라도, 판사가 감정의 소견 없이 업무적 부담 요인을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며 "대법원 판례에 따르더라도 업무적 부담 요인 판단은 전적으로 법관의 재량"이라고 말했습니다.
임자운 변호사는 "감정의도 의학 자료를 근거로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데, 업무 관련성에 관해 기존 의학 자료가 없다면 의사에게 물을 이유가 없다"며 "가령 발암물질 벤젠이 백혈병을 일으킨다는 연구는 있지만, 비인두암·췌장암을 일으킨다는 연구는 없다. 그렇다면 판사는 (의사에게 소견을 기대지 말고) 업무환경 유해성에 대한 판단을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회사의 증거인멸로 유해물질을 특정할 수 없는 경우 법관이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규범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2017년 반올림 직업병 판례"라며 "대법원 판례는 판사의 규범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축적되고 있다. 감정을 필요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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