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1. 수파누웡의 할아버지 폼마
대통령이 있고 부통령을 둔 국가처럼 루왕파방 왕국에는 왕이 있고, 통치를 대행해줄 부왕을 뒀다. 부왕은 인도 문명 영향을 받은 통치 제도로 버마 크메르 싸얌(태국)에도 있었다. 수완나 폼마. 라오인민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수파누웡의 할아버지가 루왕파방 왕국 부왕이었다. 부왕 폼마는 부인이 13명으로 19명 왕자와 31명 공주를 봤다. 그는 왕국 실권자이면서 루왕파방 역사를 저술한 지식인이었다.
1887년 6월 태평천국군 잔당 세력인 흑기군과 1975년까지 베트남 북단에 존재했던 따이족 12개 므앙 연합체 ‘십송라이쩌우’의 강력한 지도자 데오 반 찌(đèo V?n Tr?)에게 루왕파방이 함락돼 약탈당했다. 폼마는 많지 않은 병력으로 루왕파방으로 밀려든 600여명 연합군과 맞서다가 참수당했다. 당시 루왕파방 왕국은 싸얌에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으로 전락해 보호받고 있었다. 싸얌의 야전사령관 보라낫은 북부 원정을 마치고 루왕파방에 진주하고 있었고, 우기가 다가오자 태국으로 철수하고자 했다. 프랑스 루왕파방 부영사로 부임한 오귀스트 파비는 수월한 인도차이나 지배를 위해 루왕파방에서 통킹까지 교통 루트를 개척했는데, 흑기군의 진군을 미리 발견해 보라낫 사령관에게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오귀스트는 국왕 운캄과 왕족을 배에 태워 메콩강을 따라 태국으로 넘어가는 빡라이 나루로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숙소와 음식을 마련해 줬다. 국왕은 목숨을 구해준 오귀스트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싸얌의 보호를 포기하고 프랑스 종주권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1950년 수파누웡과 호치민. (사진=수파누웡 기념관)
2. 아버지 분콩
수파누봉의 아버지 분콩은 루왕파방의 마지막 부왕이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는 11명 아내와 11명 아들 13명의 딸을 봤다. 수파누봉은 11번째 평민 아내에게서 얻은 부왕의 막내 아들이었다.
3. 신이 된 수파누봉의 형, 펫사랏
1890년생. 15세 때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2세까지 교육을 받고 라오스로 귀국했다. 펫사랏은 프랑스 총독부 서기가 됐고, 능력을 인정받아 라오스 원주민 문제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라오스 왕국 최초 근대 법전을 성안했고, 성과 중심 공무원 제도를 만들었다. 법행정연수소를 만들어 유능한 공무원을 양성해 제도를 뒷받침했다. 펫사랏이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면서 라오민족주의가 크게 고양됐다. 왜냐하면 펫사랏 이전 모든 국정 운영과 행정은 프랑스 당국과 비엣인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라오인에게 받아들여졌다.
펫사랏 왕자는 독일이 프랑스에 비시 괴뢰 정부를 세우자 독립을 준비했다. 어렸을 적부터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아 모국어를 다시 배워야 했던 국왕은 프랑스에 등을 돌리기를 거부했다. 펫사랏은 라오스와 프랑스 관계가 라오스를 보호하겠단 프랑스 약속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일본에게 지배권을 빼앗긴 만큼 라오스는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버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과 마찬가지 태도였다. 프랑스가 라오스를 재점령하자 라오스 자유운동을 주도하던 펫사랏은 태국으로 망명했다.
10년 망명 생활 후 펫사라가 귀국하자 라오스 독립 아버지로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반신반왕 ‘콘꽁’으로 여겨졌다. 불행하게도 그는 정권 기반을 다지기 전인 1959년 뇌출혈로 급서했다. 그의 초상화는 상점이나 가정집, 식당 어디에나 장식되어 그의 영혼이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기도했다. 그의 초상을 넣은 펜던트는 오늘날에도 루왕파방 노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수파누웡의 부인과 자식들. 1962년 방문. (사진=수파누웡 기념관)
4. 동화 같은 수파누웡의 결혼 이야기
1909년생. 11세가 되던 1920년 수파누웡 왕자는 국왕과 귀족 자녀들로 이루어진 청소년 10여명과 함께 하노이 프랑스 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30년 문과와 이과 학사학위 과정을 모두 우등으로 마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그 뒤 1937년 베트남으로 귀국하자 프랑스 당국은 그를 나짱의 공공사업국에 배치했다.
수파누웡은 직장으로 가기 위해 28번째 생일에 사이공에서 나짱행 기차를 탔다. 나짱역 앞에는 큰 꽃밭이 있었고, 꽃밭 양쪽에는 두 개의 호텔이 있었다. 두 건물은 외관 양식 역 색상이 동일했다. 서쪽 호텔은 테르미누스이고, 동쪽은 본에어였다. 그는 ‘마지막’보다 ‘신선한 공기’라는 뜻에 이끌려 본에어로 들어갔다.
한 여학생이 수파누웡을 맞이했다. 그녀 이름은 응우엔 티 끼남. 우체국장이자 본에어호텔 주인 응우엔 반 숭의 딸이었다. 수파누웡은 첫눈에 반했다. 중부 베트남에서 나는 가장 귀한 침향 ‘끼남’이 그녀 이름이었다. 끼남은 서양식 교육을 받은 기품 있는 신여성이었다. 친구와 미인대회 구경을 갔다가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심사위원 눈에 들어 단상에 초대받을 정도였다. 그녀는 결국 미의 여왕으로 선정됐다.
사랑에 빠진 둘은 1938년에 1월 결혼했다. 라오스의 젊은 엘리트 왕자와 아름다운 베트남 자산가 딸의 결합. 끼남은 1921년 12월생으로 16세 생일을 막 넘긴 때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아들 8명, 딸 2명을 얻고 해로했다. 끼남은 집 밖에서 새벽에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고 무릎을 꿇고서 여느 라오 여성처럼 공양을 위해 스님들 탁발행렬을 기다리곤 했다. 끼남의 간소한 집무실 제단에는 베트남의 전설적 독립투쟁 지도자들인 쯩자매 동상을 모셔뒀다. 끼남은 라오스와 베트남 양국에 대해 정치적 처신을 할 줄 아는 수파누웡의 현명한 정치적 반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파누웡은 13개국어를 구사했고, 끼남은 5개국어를 배웠다.
수파누웡 기념관의 현판. (사진=제국몽)
5. 붉은 왕자
그는 큰형 펫사랏 수상의 부름을 받아 1945년 베트남에서 라오스로 돌아와 외무장관 겸 라오스군 사령관직을 맡았다. 호치민 주석은 수파누웡이 라오스로 돌아가기 전 불러 프랑스에 대한 양국 공동 투쟁을 의논했다. 호치민은 그의 정치적 멘토였다. 끼남은 10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호치민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30년간 라오스 독립을 위해 ‘3왕자’의 한 사람으로 정치 협상에 참여하고 좌파의 대중 정치가로 활동했다. 수파누웡의 작은 형으로 중립 민족주의자를 대표하는 수완나 푸마, 우파를 대표하는 짬빠싹의 왕자 분움, 좌파를 대표하는 수파누웡이 3왕자였다.
1975년 수파누웡은 베트남 전쟁 결과로 세워진 라오인민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됐고, 1986년 조기 은퇴했다. 임기는 1991년까지였다. 공식적으로는 건강 문제로 밝혔지만, 후문에는 ‘부인과 함께 여생을 즐기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수파누웡은 인기 있는 지도자였고 별명이 ‘붉은 왕자’였다. 그의 출신 성분과 대외 활동 때문에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서 곧이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1967년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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