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1. 골든 트라이앵글
'골든 트라이앵글'이라는 용어는 1971년 미 국무부 관리였던 마셜 그린이 기자회견에서 아편 무역 중심지를 일컬어 처음 사용했다. 이 지역은 버마(현재 미얀마) 북동부 샨주, 태국 북부 8개주, 라오스 북부 7개주에 걸쳐 있는 약 20만km² 면적의 광활한 산악 지역으로 한반도 면적과 비슷하다. 아편 생산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곳은 샨주로, 따이족 일파인 샨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골든 트라이앵글이 양귀비로 뒤덮이게 된 이유
1949년 중국 국공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지만, 공산당이 운남성을 완전히 장악한 건 1950년 2월20일이었다. 국민당 제8군 237사단은 운남을 포기하고 버마로 후퇴했다. 패잔병 1000여명은 버마 방위군에 포위돼 진압됐으나 수천명으로 불어난 국민당군은 미얀마군을 격파하고 거점 확보에 성공했다.
국민당군은 본토 회복을 위해 샨주에서 신병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황무지 개간과 양귀비 재배 등 아편을 거래할 사람들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곧 가장 큰 아편 무장 세력이 됐고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 아편 사업을 장악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이 지역에서 군대를 이용해 마약을 보호하고, 군자금을 위해 마약을 밀매한 최초의 무장 마약 밀매 조직이 됐다.
루앙남타주 고무밭.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인 라오스 북부는 산이 많다. (사진=우희철 작가)
3. 마약왕이자 샨족 대통령이었던 쿤사
- 초기 활동
쿤사는 1934년 중국인 차 상인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가 죽고 재혼한 어머니도 2년 뒤 숨을 거뒀다. 그는 양귀비밭 한가운데에 살던 마을 수장이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절에서 사미 생활을 한 게 그가 받은 정규교육 전부였고, 문맹으로 살았다. 1950년 2월 중국 공산당이 운남을 장악하면서 버마로 도피한 국민당 군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쿤사는 16세 때 독립청년단을 결성했는데, 조직이 수백 명으로 늘자 국민당에서 독립했다. 독립 후 그는 상황에 따라 버마 정부군과 여러 반군 사이에서 태도를 자주 바꿨다.
1963년 쿤사는 버마군 북동부 사령부 통제를 받는 민병대로 재편했다. 쿤사는 지역 샨족 반군과의 전투에 대한 명분으로 아편을 재배하고 헤로인을 합법적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쿤사는 샨주에서 강력한 민병대 지도자이자 악명 높은 마약 밀매범이 됐다. 1967년 그의 부대는 태국-버마-라오스 국경 ‘아편전쟁’에서 국민당 잔당 매복에 걸려 타격을 받았고, 라오스군에게 아편을 강탈당했다. 이 사건으로 부대 사기가 저하되고 수년간 라오스군 매복에 시달리면서 전력이 떨어졌다.
- 체포와 석방
1969년 샨족 반군은 비밀 회담을 통해 쿤사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으나 회담이 누설되면서 쿤사는 반역죄로 투옥됐다. 쿤사의 부하들은 1973년 소련 의사 두 명을 납치해 1974년 쿤사와 교환을 성사시켰다. 이 협상은 태국 장군 크리앙싹 중재로 이뤄졌는데 쿤사는 1981년 그의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5만달러를 기부했다.
- 쿤사의 전성시대
1976년 쿤사는 조직 이름을 샨족의 다른 분파랑 통합해 ‘므앙따이군’을 결성, 사령관이 됐다. ‘므앙’은 나라이고 ‘따이’는 샨족 정체성을 나타내므로 므앙따인군은 ‘샨족의 국군’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샨족 이름인 '쿤사'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1991년에 수백명 샨족 대표로 의회를 구성하고 쿤사는 독립 샨주 건국을 선언하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그는 태국 북부에 주둔했다. 태국 정부는 쿤사의 활동을 사실상 용인했는데 라오스와 버마에서 활동하던 급진적 혁명 세력과 자신들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기대했다.
- 200만불 현상금 걸린 마약왕 쿤사
쿤사가 1974부터 1994년까지 전성시대를 보내는 동안 뉴욕에서 판매되는 헤로인 비중은 5%에서 80%로 증가했다. 미국 마약단속국은 쿤사의 헤로인 순도가 90%로 업계 최고로 평가했다. 미국은 쿤사를 “세계 최악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체포하는 데 200만달러 현상금을 걸었다. 당시 외국인 현상범 중 가장 높은 액수였다. 1981년 태국군과 태국 내 국민당 연합군이 태국 북서부 지역 공산 반군을 격파한 뒤, 미국 관리들은 태국 정부에 쿤사를 축출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태국군 레인저스가 쿤사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대원 거의 전원이 전멸했다.
태국의 압박으로 쿤사는 결국 버마 지역으로 후퇴했다. 1987년 미국은 버마 정부에 ‘마약 진압’ 명목으로 쿤사 제거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버마와 태국 연합군 그리고 여러 대의 F-5E 전투기가 참여한 전투에서 쿤사를 격파했단 보도가 태국 언론으로 보도됐다. 이 보도는 완전히 거짓이었고, 쿤사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버마와 태국 정부는 그가 통제하는 지역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버마군과 정보기관은 다른 민족이나 공산주의 반군과 싸우는 대가로 그의 주둔을 용인했다. 버마로 후퇴한 쿤사는 이들과 협력 관계였던 것이다.
일하러 가는 여성들. 루앙남타. (사진=우희철 작가)
- 쿤사의 여론전
쿤사는 자신의 군사 및 아편 수출에 대해 샨주 독립운동 자금으로 포장했다. 쿤사는 아편의 재배, 정제, 무역에 대해 각각 40%의 ‘세금’을 걷고 있다고 밝혔다. 쿤사는 항상 자신을 마약상이 아니라 자유의 투사라고 주장했다.
쿤사는 아편 근절 대가로 유엔 지원금, 외국인 투자금, 그리고 작물 대체, 교육, 의료 프로그램을 위한 민간 지원금 액수를 제시했습니다. 쿤사는 호주 언론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호주 정부가 연간 5000만 호주달러를 현금으로 주거나 농업 원조금으로 지급하면 8년간 작물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세계 헤로인 공급량 반을 즉시 파괴할 수 있는 조치였다. 미국과 호주 정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쿤사 이후 마약 무역을 장악한 와족 연합군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쿤사가 주장한 바와 비슷한 면이 있다.
-쿤사의 영향력 약화와 항복
운남성에서 중국 남부로 이어지는 헤로인 무역로가 개설되면서 태국 국경을 통한 쿤사의 중개자로서 입지는 약화됐다. 버마 정부도 쿤사가 샨주 독립 의지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태도 변화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와족의 연합군 세력이 샨족에 대해 강력한 군사적 도전자로 부상하게 됐다. 샨족 내부적으로도 독립은 허울 좋은 명분이고 아편 밀무역이 목적 아니냐는 의심이 확산됐다.
쿤사는 은퇴 결심을 굳히고 정부와 비밀 협상을 통해 항복했는데, 유일한 조건은 미국에 그를 넘기지 않는 것이었다.
-쿤사의 항복 의식
쿤사는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며 버마군 사령관을 맞이했다. 양측 대표단은 선물을 교환하고 사진을 찍으며 정중한 경칭을 사용했다. 쿤사는 TV 카메라 앞에서 정부 측 콰바 사령관에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콰바 장군은 ‘그는 항복했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니 용서합시다’라고 화답했다.
쿤사는 항복 전 자신이 사라지면 ‘아편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쿤사 대신 웨이쉐깡이란 인물이 나타났고, 므앙따이군을 와족 연합군이 대체했다. 골든 트라이앵글에 아편은 줄었을 수 있으나 메스암페타민이란 마약이 맥도널드 햄버거 양보다 더 많이 전 세계로 공급되게 됐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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