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 부정선거 '망상의 늪'
2025-05-22 16:00:49 2025-05-22 16:39:03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속칭 1980년대를 일컫는 ‘쌍팔 시대’에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가운데 ‘내 귀에 도청장치’ 사건은 ‘쌍팔 중 쌍팔’인 1988년에 일어난 일이다. 
 
1988년 8월4일. MBC 뉴스데스크는 오후 9시 시보를 시작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서울시 지하철 요금 인상 검토 뉴스가 보도되던 시점. 갑자기 뒤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저는 가리봉1동에 사는 소○○이라고 합니다” 
 
온갖 보안을 뚫고 스튜디오에 버젓이 들어온 것도 기가 찰 일인데, 난입한 괴한이 “귓속에 도청장치”를 부르짖는 모습이 전국에 생방송되는 일도 ‘요즘 같은 세상’에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진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 이후에도 ‘도청장치 귓속론’을 숱하게 외쳤다. 1년 뒤인 1989년 9월2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전경과 학생이 대치한 서울대 시위 현장에서 양말과 구두만 남긴 누드 상태로 "도청장치가 귀에 있다"고 주장했다. 연행된 뒤 시위 분위기가 애매해져 유야무야 해산됐다. 1991년 3월에는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다시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를 외치면서 알몸 시위를 벌였다. 
 
윤석열씨가 21일 오전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 관람을 마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당시 경찰이 밝힌 이유는 ‘망상증’이다. 망상증에는 ‘괴이한 망상’과 ‘괴이하지 않은 망상’이 있다. 괴이한 망상은 흔히 말하는 조현병으로 비현실적인 내용이나 환상, 환시, 환청 등이 주를 이루면서 인과관계가 정립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 귀에 도청장치’는 괴이한 망상에 가깝다. 
 
문제는 괴이하지 않은 망상이다. 내용이 환자 스스로 주장하는 인과관계가 정립된, 망상은 망상인데, 다른 사람이 들어도 그럴 듯한 내용을 굳게 믿는 것이다. 체계성과 논리성이 있고, 세계관이 현실적이며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지극히 일어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망상, 즉 속칭 ‘헛소리’일 뿐이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윤석열씨의 첫 공개 행보는 영화관이었다. 윤씨는 파면 이후 17일 만인 21일 서울의 한 영화관을 찾아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를 관람했다. 
 
비상계엄 당시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들이 선거관리위원회를 습격했을 때 ‘저길 왜 뜬금없이 무장병력이 들어가나’라고 의문을 가졌는데, 이후 계엄 선포 요지 가운데 하나가 ‘부정선거’라고 명시되자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었지 싶다. 윤씨는 대한민국의 선거 모두가 ‘부정선거’라는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자신이 0.7%포인트 차로 이긴 대선도, 참패로 마무리된 총선도, 모든 선거가 부정이라는 관념적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씨가 6·3 대선에 영향을 줄 요량으로 움직인 행보인지, 아니면 스스로 굳게 그렇게 믿고 있는지는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윤씨 마음속 깊은 구석엔 망상이 단단하게 박혀 있는 듯싶다. 거리의 일반 민초들이 망상에 빠져 있어도 우려스러울 판인데, 그래도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수반이 망상의 늪에서 허우적댄다고 생각하니 막막할 뿐이다. 저런 양반에게 한때 나라를 맡겨놨다고 여기니 더더욱 아찔하고. 
 
오승주 공동체부 선임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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