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전후로 바이든 정부의 지난 4년을 회고하는 글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전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반도체지원법>(CHIPS Act: 이하, 칩스법)을 꼽았다. <칩스법>은 반도체를 국가안보 및 공급망 안정 차원에서 핵심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미국 내 제조·R&D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법이다. 보조금·대출·세제 혜택, 투자세액공제, 중국 등으로의 투자 제한, 자사주 매입 제한 등이 주요 골자이다.
바이든의 치적으로 <칩스법>이 거론된 것은 정치 양극화 시대에 초당적 합의로 입법화에 성공했고, 미국 사회 특유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혜 기업들에게 일자리 창출이나 초과이윤 공유 등 사회적 책임을 부과한 산업정책과 사회정책의 새로운 결합 모델도 주목할 만하다. 하버드대학의 대니 로드릭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마리아나 마추카토에 따르면, 이 새로운 산업정책 모델에는 정부가 혜택을 제공하는 대가로 공익적·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해 기업들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구조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구조 혹은 부과조건은 수혜 기업의 약속·책임·행동을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행위를 공동선과 정렬시키고 공공 지원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반도체특별법>이 입법과정 중에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관세 전쟁 등 대외 리스크에 대응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목적의 이 법은 국가반도체산업본부 설립, 전기·용수 등 인프라 확충 의무화, 반도체클러스터 지정, 특별회계·보조금·세제지원 등을 담고 있으며, 주 52시간 근로 예외 적용 문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기술집약적인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에는 부차적이다. 그럼에도 이 사안이 핵심 쟁점이 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법안의 경우, 목적과 관련해 경쟁력 강화와 국가안보만 강조되고 공익적 측면이 누락돼 있고, 운영과 관련해 기업의 요구와 정부 지원만 열거될 뿐 수혜기업의 책임을 규정하는 부과조건이 없다는 한계도 발견된다. 이는 미국의 <칩스법>에 크게 미달되는 수준으로, 개발연대의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명시하고, 친환경·동반성장·사회환원·지식재산권 공동활용 등 부과조건을 명문화하는 방향의 입법 보완을 통해 정책의 경제적·사회적 효과를 한층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칩스법>은 바이든 행정부가 시도한 가장 야심적인 정책이었다. 이 법의 정책 효과가 가시화되기 전에 대선을 맞이했던 것은 민주당 정부의 불운이었지만, 시간이 더 많았어도 집권당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표를 얻지는 못했을 성싶다. 반도체산업 육성이라는 목적만으로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추구할 만한 시대적 소명이자 필생의 과업, 곧 ‘미션’으로 미국인들의 삶에 깊이 각인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0년대의 달 탐사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제안을 인종과 계층을 뛰어넘어 모든 미국인이 승인함으로써 그것은 미션이 되었고,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백개의 프로젝트 기반 해법들이 동시에 추진되었으며, 기술 및 산업에서의 엄청난 혁신과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통합이 그 뒤를 따랐다. 마추카토 교수는 미국 정부의 달 탐사 프로젝트에 포함된 정부·기업·산학연·시민의 다양한 관계망과 각종 활동을 ‘미션 경제’라고 부른다. 이때 정부는 기획자·투자자가 되어 시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업 및 산학연의 혁신을 유도하고, 시민들은 이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공동선 달성에 기여하며, 혁신과 성장의 열매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향유하는 협력체계가 펼쳐진다.
우주 개발을 이끄는 주체가 나사에서 테슬라로 바뀌었고, 막대한 경제력과 기술력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지구온난화·불평등·지역쇠퇴 등의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60년 전 달 탐사의 성공 신화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실한 것이 ‘미션 경제’다. 기술진보가 사회문제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정부가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과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강력한 미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장동력이 약화되고 사회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내란 사태 종식이라는 과제까지 더해진 지금, 통합의 에너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해결을 가장 절실히 원하는 과제로 거론된 것들을 미션으로 합의하고, 구성원 모두가 그 미션을 완수하는 데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효능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진영을 공격하는 데 쓰이던 좌절과 분노와 증오의 에너지는 공감과 협력과 창조의 에너지로 빠르게 전환될 것이다. 사회 전체에 더 큰 가치가 창출되고 우리 모두의 ‘좋은 삶’에도 몇 걸음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