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고대 로마에 어원을 둔다. 고대 로마에서는 세금 부과와 참정권을 위해 시민들이 재산을 등록했는데, 가진 재산이 없어 나라를 위해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릿수, 즉 자식들밖에 없는 계층을 ‘프롤레타리우스’, 즉 ‘애낳는 사람’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구성원으로써 인정받고 국사에 참여하려면 국가를 위해 가진 것 일부를 출자(出資)할 수 있어야 하는데, 출자(出子)밖에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국가에 아무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늘 국가의 진정한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의심받았다. 국가에 아무런 몫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국가를 팔아먹을 수 있는 위험한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에게까지 참정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크세노폰 『헬레니카』 중 테라메네스의 연설). 물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배제한다면, 배제된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사회는 적대와 분열에 빠질 것이다. 고대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위한 개혁 조치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만을 잠재우고 더 큰 화를 막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자식들만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의 기여가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적 삶을 살면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사회 전체의 부에 기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분업과 전문화가 고도화되어 각 개인이 모두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기능을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만 어긋나도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생산, 교환, 소비 등 경제활동을 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가 늘어나는 경제체제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둘째, 여러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의견, 생각, 욕망의 다양성 자체가 자산이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가진 무언가가 뜻밖에 혁신의 잠재력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뛰어난 공적을 쌓거나 대단한 희생이 없이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일로 경제 활동에 종사하며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크고 작게 사회에 기여하는 셈이 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거, 교육, 의료, 실업대책 등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인 조건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국가에서 사회적 권리들, 즉 사회권이란 이름으로 보장하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권은 언뜻 보기에 시혜적으로 베푸는 자선의 의무와 동일한 것처럼 혹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들, 즉 인권과 구별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유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설득하려면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이유들이 필요하다.
사회권의 보장을 “퍼주기”, “세금도둑”, “복지병”, “포퓰리즘”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득이 가능할까? 우리가 이룬 사회적 부는 한 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각자 다른 일들을 하며 그 안에서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고 교환하면서 창출된 것들이다. 앞으로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이런 사회적 부는 유지되고 더 늘어날 것이다. 나 혹은 당신의 실패가 우리 모두의 실패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권을 설득하는 방법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한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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