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나이를 먹어가며 흐릿해져 가는 것은 기억만이 아니다. 과거에 뚜렷하게 구분했던 모든 경계도 점점 무너지고 모호해진다. 미와 추, 행과 불행, 진보와 보수, 그리고 선과 악. <설국열차>의 앞칸과 뒷칸처럼 온전히 단독으로 존재하는 불의와 정의가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 세상을 향한 분노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모든 고통과 저주가 나만 향하는 것 같았던 때도 그 시간들이야말로 나를 키운 소중한 순간이었다는 걸 알고 새삼 감사하기도 했다.
인간의 감정은 또 어떠한가. 복잡오묘한 인간의 심리를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한다.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혹은 성황이었던 공연이 끝난 뒤 기쁨과 환희로만 가득해야 할 사람의 마음속에 허무와 고독이 동시에 차오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장첸, 강해상, 주성철에 이어 백창기라는 새로운 빌런이 등장했다. <범죄도시4>의 주인공이다. 주변을 보면 이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 ‘선한 빌런’이라는 백창기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악이 설명되거나 공감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악이어야 빌런의 매력은 커진다. 선과 악이 완벽히 대결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오만가지 감정’ 따위는 철저히 무시되어야 하기에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빌런은 실패한 캐릭터가 돼버린다.
이런 면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타쿠미는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타쿠미는 시골마을에서 딸 하나와 함께 사는 소시민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선한 사람이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한 가지, 딸 하나의 하교시간을 자주 깜빡깜빡한다는 정도. 그렇게 평화롭던 마을 사람들을 고민에 빠뜨린 건 한 주민설명회가 열리면서부터다. 설명회는 그 마을에 글램핑장을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 자리에서 주민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회사에게 대책마련을 요구한다. 그런데 사실 그 회사는 정부의 코로나 지원금을 얻기 위해 꼼수로 사업을 시작하려 하는 것이라 마을 주민들과의 갈등은 애초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 갈등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타쿠미에게는 큰일이 생기고 마는데 그 과정에서 타쿠미가 보이는 행동은 관객을 일순간에 충격에 빠뜨린다.
충격을 딛고 타쿠미를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왜 나는 절대악의 인물은 허용하면서 타쿠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어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이분(二分)의 스키마 때문이었다.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게 거짓이 아님에도 난 선과 악에 대해서만큼은 계속 경계를 짓고 싶었나보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통해 악은 의외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의 힘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 신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상황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내재한 악을 발현시킨다. 그 즉흥성과 충동성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의 원인으로 지적한 무사유(thoughtlessness)를 앞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악을 어떻게 억제시킬 것인가. 당연히 인간의 의지보다 힘이 센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 교육과 사회제도를 강조한 순자의 가르침이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한 까닭이다. 순자의 가르침을 이 영화에 적용하면 저 평화롭고 깨끗한 시골마을이 도시와 자본으로부터 훼손되는 걸 막아야 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선 의사가 돈이 아닌 사명감으로 환자를 대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도 법 앞에 공정하게 만드는 것.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저것들이 해결된 후에라야 우리는 영화가 던지는 이 질문의 답을 입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답이라고 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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