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평화의 적은 누구인가?
2024-04-26 06:00:00 2024-04-26 06:00:00
역사학자 심용환은 중국 왕조의 고구려 침공사를 다룬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 전쟁을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한반도까지 자기 세력권 안에 둘 수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실험으로 이해하고, 고구려의 승리와 함께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이라 보고 있다. 당, 원, 청 등 그 이후 왕조들도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를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다. 따라서 아마 중화인민공화국 역시도 미래에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은 개연성이 높다. 한편, 배기찬은 『코리아 다시 기로에 서다』란 책에서 한반도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부딪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오늘날 분단을 포함해 한국인이 겪은 역사적 부침은 모두 이 두 세력 사이의 역학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대륙세력에 해당하는 중국의 통일국가도,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해양세력의 팽창도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들)를 일시적으로는 굴복시킬 수 있을지언정, 결코 흡수하거나 통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역사로써 증명된다. 무슨 짓을 해도 결국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그러나 두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는, 비관적으로도 낙관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결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실은 유아(唯我)적이다. 다른 ‘주체들’을 다 상수 내지는 조건으로 놓고서, 오직 한반도의 국가만이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각 국가들이 헌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헌법이란 국가가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이며, 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전쟁포기’와 ‘교전권 부인’은 ‘절대 누구를 때리지 않겠으며, 내 몸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다 잘라내버리겠다’는 스스로 한 약속에 해당한다. 만약 우리가 일본을 해양 세력으로 간주한다면,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필연성에 매여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지정학적 위치와 패권세력 간 경쟁 속에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필연성이다. 그런데 필연성에 매여있는 것은 무언가를 약속할 수 없다. 약속은 자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평화헌법‘은 형식적으로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시민들에 의해 실질적으로도) 그 필연성에 매이지 않겠다는 자유로운 약속의 증거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평화의 적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해보자. ‘우리’의 적이 몇몇 특정 적성 국가들일 수는 있겠지만, ‘평화’의 적은 실은 더 근본적으로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모든 형태의 필연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친구와 적을 가르는 전선은 국가 사이가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전쟁을 부채질하는 조건들 사이에 그어진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그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정권의 유지만을 안중에 둔 북한과 맞서고 있다. 우리가 자유롭게 평화를 선택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전쟁을 일으킬 필연성에 저항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떨어지는 번개가 우리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서 그것을 적 혹은 철천지원수로 삼지는 않듯, 부자유한 것은 자유로운 것의 적이 될 수 없다. 적을 똑바로 아는 것이 승리의 첫걸음이듯이, 평화의 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하는 첫걸음이다. 세계 도처의 국가들 역시 이를 새겼으면 하고 희망한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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