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하나의 대상은 각각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인간이 ‘정치적 존재’라고도 말할 때, 이는 이 셋 중 하나에 포함되는가 아니면 별개의 고유한 관점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정치를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리 답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정치라고 부르는 행위, 예를 들어 선거에 출마하거나 투표하거나 집단 전체에 구속력있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 등을 심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박근혜 씨의 대통령 당선과 재임 기간 중 일어났던 국정농단을 어머니에 이어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까지 잃은 ‘딸 박근혜’의 심리적 충격과 해소에 주목해 해석하는 것은 언론에서 이미 수차례 소개된 익숙한 관점이다. 국회의원들이 보이는 공천에 대한 집착 혹은 비상식적인 행태는 애초에 정치가 심리적인 무언가라는 증거인 것 같다. 정치란 무릇 지역구 선거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고 호탕하며 위세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의 대부분은 공무원들, 기자들, 보좌관들 앞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자기의 권력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정치는 권력 추구와 자기 과시를 통한 심리적 관점으로 모조리 해석되고, 여기에 인간에게서 더 이상 정치적 존재로서의 고유한 측면을 찾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보다 좀 더 복잡한 문제는 사회(학)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사이의 차이다. 정치란 항상 다수의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고려될 때에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 혹은 사회과학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사회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학적 법칙과 정치학적 법칙도 포함된다. 단순다수대표제 선거제도하에서는 양당제가,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다당제가 이루어진다는 프랑스의 사회과학자 뒤베르제의 법칙은 지금의 정치학에서 주로 관심을 가질 법한 정치학적 법칙의 대표적인 예시다.
집단에 속한 개인의 행동과 사고를 구조화하는 사회적 사실로서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왜 문제인가? 흔히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개인을 넘어서 있는 정치(학)적 법칙이 존재하며 정치적 성공이란 그 법칙에 잘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연 거기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할까? 자본주의는 경제학적 법칙에 따라 계속될 것이고, 지금의 반생태적 정책에 따라 기후위기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선거제도를 바꾸어도 위성정당을 만드는 거대 정당들의 행태는 정당정치학적 법칙에 따라 필연적이다. 남녀갈등이나 지역적 동서갈등은 오직 표심을 위한 프레임일 뿐이다. 결국 정치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정치적으로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순수하게 정치적 존재라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사회(학)적 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더 나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현행 질서를 문제 삼고 이전에 없던 더 나은 질서를 상상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일 것이다. ‘시민’이란 바로 여기에 붙이기에 가장 적절한 이름이다. 현재 우리는 충분히 정치적인가?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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