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배우 손석구 씨가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 기자간담회에서 “연극 무대에서의 연기가 가짜 연기 같았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원로’ 배우 남명렬 씨가 이에 대해 “오만하다”, “진짜 연기를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했고, 역시 ‘원로’ 배우인 이순재 씨도 “연기는 원래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며 거들었다. 결국 손 씨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반성했다며 손편지로 남 씨에게 사과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한 젊은(하지만 그도 나이가 이제 40이다) 연기자의 실언과 이를 꾸짖는 선배들 사이의 해프닝 정도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런 마무리에 아쉬움이 없지 않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씨는 이 논란을 “갈등 구도로 소비해버린 연예 매체들”을 비판하면서 “예술에 대한 진짜 논쟁”을 기대한다고 한 칼럼에 썼다. 하지만 동시에 위 씨는 무언가를 ‘가짜’라고 말한 것 자체를 두고 “오만”하고 “독선적”이라 규정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도덕적 평가 속에서 이어질 논쟁이란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이 논란의 배경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바로 정확히 이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아우라’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진 계기였기도 한 이 에세이는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도 특히 영화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진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이 가진 아우라는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 이전의 연극과 이후의 영화를 비교하는 데도 적용된다. 연극 무대 위의 배우는 “자기 전체를 통해” 연기하고 그럼으로써 극중 인물로서 혹은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갖는다.
반면에 영화 제작 현장에서 배우는 기계장치 앞에서 연기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체험을 하거나 마치 일종의 소품처럼 취급받게 된다. 이는 최신 컴퓨터그래픽 기술과 어우러지는 연기를 해야 하는 오늘날의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 이전의 연기는 ‘진짜’이고, 기계장치 앞에서의 연기는 ‘가짜’인 것일까? 만약 그 판별 기준이 ‘아우라’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우라를 지닌 연극의 제의적, 종교적 기원을 고려했을 때, 무대 위는 이상화된 공간이며 연극은 실은 아름다운 가상, 즉 가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예술형태가 막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에 이 글을 썼다. 이제 시간은 더 흘러, 기계장치 앞에서의 연기가 오늘날 유튜브나 TV드라마 속 많은 배우들 혹은 희극배우들의 의해 ‘생활연기’, ‘현실고증연기’로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가 관찰 혹은 예견했던 것처럼, 영화 혹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영상매체예술은 일상의 공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술작품의 새로운 무대이자 대상이 되는 가능성을, 그리고 대중이라는 새로운 수용자가 생겨나는 계기를 열었다.
그렇다면 어떤 연기를 ‘진짜’ 혹은 ‘가짜’라고 부르는 것 자체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어떤 기술이 존재하는 어떤 시대에, 어떤 태도를 지닌 수용자에게, 어떤 제작방식에 따라서, 어떤 연기가 어떤 의미에서 진짜 혹은 가짜인지, 훨씬 더 복잡한 문제만이 논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가짜’라는 말 자체를 불쾌해하거나, 그런 말의 ‘오만함’과 ‘독선’을 꾸짖어서는 던져지기 힘든 질문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말이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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