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마음이 편해졌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았다. 얼마 전부터 TV가 고장 나 뉴스와 시사 프로를 안 본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이 궁금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상쾌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TV 핑계를 댔지만, 이실직고하자면 그런지 꽤 오래됐다. 아내랑 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들짝 놀라 끄곤 한다. 어디 우리 집뿐일까.
정치 무관심층이 늘고 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람 중에도 정치를 외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심지어 1년여 전 정권이 바뀌었다고 환호했던 사람조차도,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고개를 돌리고 있다.
여건 야건 둘 다 싫다고 정치에 등을 돌리는 무관심은 정치를 극단화한다. 정치에서 눈을 떼는 대다수 사람은 주로 양 극단 사이에서 두텁게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이다. 중간층이 얇아지다 보니 극단만 남게 되고, 남은 이들은 배수의 진을 치고 참으로 비장하게 상대를 향해 총을 쏴대고 있다. 특히 요즘 ‘양평고속도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두고 극한 대립의 늪에 빠져 있다. 한쪽은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쪽은 이를 ‘괴담’으로 치부한다. 해석은 차치하고 사실 여부조차 합일점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정치 무관심이 낳은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어떤 말이 옳으냐는 뒷전이고,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해졌다. 내 편이 하는 소리는 무조건 옳고, 상대는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틀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협과 절충이 되지 않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 정치가 늘 대치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보니 그 틈바구니에서 대다수 중간층의 운신 폭은 협소해지고 양 극단의 증오 수위는 더 올라간다. 정치 무관심이 외면을 넘어 혐오를 낳는 악순환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양 극단의 정치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섞여 보다 나은 대안을 찾아갈 수 없다. 그저 다른 쪽보다 약간의 우위만 점하면 되고, 그러면 독식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기 영합과 확신 편향, 사생결단의 전투의지만 있으면 된다. 조율과 융합의 기술은 불필요하다. 조정과 타협을 통한 창의적 대안도 기대할 수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
또한 양 극단의 정치에서는 ‘악마의 변호인’이 설 자리가 없다. 탄광의 카나리아 같이 다가올 위험을 경고하고 내부 비판을 하면 진영 내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생산적 의견 교환은 고사하고 증오와 분노의 소모적 감정 대립이 빈번해져 이를 보는 다수의 정신건강을 해친다. 나아가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이 보장받지 못한다. 극단의 큰 목소리에 묻혀 그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중간층이 정치 무대에서 기권하고 퇴장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 국민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해서 정치를 독점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정치라는 우물에 더 이상 독을 풀어선 안 된다. 정치인의 말부터 정화해야 한다. 첫째, 내 편 네 편 가르고 피아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갈라치기 말, 둘째, 남은 비난하고 자신에겐 너그러운 내로남불 말, 셋째, 정치 불신을 부추기는 가짜뉴스와 거짓말, 넷째, 모든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남 탓하는 말, 다섯째,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막말. 이것들은 바로 우물에 타는 독과 같다.
독을 푸는 정치인의 입을 틀어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들지 않으면 된다. 적어도 이런 말로 이득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불의를 보면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오염된 우물을 깨끗한 물로 정화해야 한다. 결국 탈정치와 정치 양극화를 극복하는 주체는 정치인도, 극단에 서 있는 사람도 아닌 중간의 다수 유권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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