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문명화된 내전”이라고들 한다. 정말로 정치가 전쟁이라면, 다수결은 거기에 딱 맞는 의사결정 방식인 것 같다. ‘서진정책’이니 ‘세대포위론’을 이야기한 이준석 전 대표 역시 정치를 ‘누가 더 다수를 동원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며, 합의야말로 정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수결과 합의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우리 정치가 정말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갖췄는지, 정치인들이 ‘설득하고 설득될’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합의 없는 정치’의 원인이 대결적 구도를 심화하는 현행 선거제도 때문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대안이 될 3가지 선거제도 개혁안을 놓고 지난 4월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렸다. 그런데 합의를 위해서는 토론과 숙의가 있어야 하는데, 회의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상호토론은 없었고 그저 참여 의원들 각자가 자유발언을 하는 식이었다. ‘전문가’들은 단 하루 참여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그들을 상대로 한 의원들의 질의도 적었다.
토론과 숙의는 어떤 형식이어야 할까? 먼저 공동의 지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3가지 선거제도가 어떤 장단점을 갖고 각각 어떤 가치에 더 중점을 두는지는 토론할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조건들에서 어떤 가치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지, 어떤 정책의 장점이나 단점이 더 부각될 여지가 있는지 등은 사실로서 알아야 할 대상이다. 바로 그 다음에서야 이러한 지식과 사실정보를 토대로 토론과 숙의가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발언대에 불과했던 전원위원회는 결국 각 정당, 혹은 개별 의원들 사이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국회의장실이 공개한 결산자료 역시 자리에서 나온 ‘말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추후에 최종 협의를 할 것을 주문했지만, 이는 결국 각 거대여야 지도부에 맡겨질 가능성이 크다. 다수가 합의에 실패해 소수에게 결정권이 돌아가는 ‘비민주적’ 상황이 반복될 위험이 크다.
‘500인 시민참여단 공론조사’에서는 시민참여단에게 충분히 숙의할 정보와 기회를 제공한 뒤 선거제 개혁 관련 사안별 의견을 조사했다. 5월 17일자 본지 시론(김두수 시대정신연구소 대표)은 숙의를 거친 후 소선거구제에 대한 찬성률이나 의원정수 확대의 응답률이 높아지는 등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지만,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토론이 부족했고 지식이나 사실의 문제와 관련해 틀린 판단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여러 긍정적인 측면이 있긴 했지만, 나는 시민들의 숙의가 생각의 변화를 넘어선 하나의 합의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그 자체로 한계라고 생각한다. 25일자 본지 시론(채진원 경희대 교수)은 어쨌든 시민참여단의 응답을 종합한 “제4안”을 국회가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물론 (법적효력이 없으므로) 국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런 결정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의무까지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을 납득시키는 것이야말로 전사회적 숙의를 위한 건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를 바라며 제3지대를 구축한다느니, 젊은 정치인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다느니 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합의를 만들어낼 줄 아는 본연의 정치이다. 토론과 숙의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과 능력,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떠한 정치도 불가능하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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