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뮤지컬 오케스트라는 보통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극장 분위기를 장악하지요. 집안 구석에 숨어있는 보일러나 온수기, 냉방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 최초로 콘덴싱 보일러를 만든 경동나비엔이 320조원에 달하는 냉난방 공조(HVAC)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24일 찾아간 이곳은 단일 규모 세계 최대 보일러·온수기 생산기지인 경동나비엔 서탄공장입니다.
오케스트라는 공연을 시작하기 전 튜닝을 하는데, 관객에겐 썩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서탄공장도 그랬습니다. 김용범 영업·마케팅 총괄 부사장은 2012년 5월 공장을 지을 때 받았던 비난을 기억합니다. '매출 2000억원 규모 보일러 기업의 무모한 도전'이라거나 '시장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계획'이라는 손가락질이었습니다.
경동나비엔 서탄공장 전경. (사진=경동나비엔)
'무모한 도전' 비난이 10년 뒤 '5억불 수출의 탑'으로
하지만 경동나비엔은 해외로 눈 돌린지 오래였습니다. 김 부사장은 성장 전략을 고민하던 2005년을 돌아보며 "국내 시장 점유율이 100%면 매출 6000억원짜리 회사로 성장의 한계가 명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세계 보일러·온수기 시장 규모는 30조원으로, 우리가 10%를 점유하면 매출 3조원짜리 회사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며 "20~30% 이상 에너지를 아끼는 콘덴싱 보일러에 다른 회사는 물론 정부도 무관심해, 미국에서 그 의미를 증명하고 돌아오자는 경영진 판단이 있었다"고 미국 진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북미 진출의 서장은 '충격'이란 부제가 어울립니다. 김 부사장은 "2005년~2008년 미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며 "부자나라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밤새 물탱크에서 200리터(ℓ)가 데워졌는데, 아침에 자식이 샤워로 다 쓸 경우 부모가 새 온수를 기다리는 실상에 경악했습니다. 시장 조사 과정에서 느낀 문화충격이 콘덴싱 온수기 진출의 기회가 된겁니다.
성공을 확신한 경동나비엔은 2008년 미국에 콘덴싱 온수기 2만대를 수출한 뒤 서둘러 공장 규모 확장에 나섰습니다. 서탄공장의 연간 생산 규모는 첫 가동한 2014년 120만대에서 현재 200만대로 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연간 보일러 시장 규모인 130만대의 1.5배 수준입니다.
콘덴싱 온수기 인기를 공급이 뒷받침하면서, 미국 내 콘덴싱 온수기 시장 규모는 80만대로 커졌습니다. 이 가운데 45만대를 경동나비엔이 공급했고 나머지 35만대는 '추격자'인 일본과 미국 회사 몫입니다.
서탄공장은 'K-보일러' 영토를 넓혀왔습니다. 경동나비엔 매출액은 2014년 4289억원에서 2019년 7742억원, 2021년에는 국내 보일러 업계 최초 1조원 돌파 기록으로 이어졌습니다.
해외 매출 비중도 2014년 46%에서 2017년 처음 50%를 돌파하며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동나비엔은 한국 보일러·온수기 전체 수출의 88.2%를 담당하면서 지난해 업계 최초 '5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습니다.
경동나비엔 하이드로 퍼내스와 히트펌프. (사진=경동나비엔)
보일러·온수기 넘어 '생활환경 가전시장'으로
경동나비엔은 2026년까지 서탄공장 생산량을 연간 439만대 수준으로 키울 방침입니다. 이를 위해 냉방 관련 신규 제품 생산라인도 구축해 10만평 규모로 확대합니다. 충주·아산·평택에 흩어진 공장을 통합한 일괄체계를 세울 예정입니다. 북미 진출 당시의 고민을 다시 하면서 더 큰 시장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경동나비엔은 보일러·온수기를 넘어선 '생활환경 가전시장' 기업으로 거듭나려 합니다. 김 부사장은 "전세계 보일러·온수기 시장 규모가 약 30조원인데, 점유율 10%면 3조원이 한계"라며 "이사 갈 때 들고 가지 않는 물건, 집과 하나가 돼 주거환경을 만드는 '설치 가전'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기회는 미국에 있습니다. 김 부사장은 "한국 인구 5000만명에 보일러 시장 규모 150만대인데, 인구 3억명이 넘는 미국은 왜 50만대인지 살펴보니 '퍼내스'를 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퍼내스 시장 규모는 450만대 입니다.
퍼내스는 북미 지역의 주된 난방 방식입니다. 열로 공기를 가열해 실내로 공급하는데, 온도 높은 연소 배기가스로 공기를 가열하므로 공기가 건조합니다. 실내 온도 편차도 커서 난방의 쾌적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제기돼 왔습니다.
특히 퍼내스 설비에 균열이 생기면 질식사 할 수 있어, 겨울이 오기 전에 업자들이 집집마다 장치를 점검한다고 합니다. 연탄 쓰는 집에서 겨울에 장판을 들어내 바닥 갈라졌는지 확인하듯이 말이죠. 앞으로 서탄공장이 만들게 될 HVAC 제품 '콘덴싱 하이드로 퍼내스'가 발톱을 드러낸 배경입니다.
경동나비엔 서탄공장 비전 검사 시스템. (사진=경동나비엔)
HVAC 진출로 2032년 매출 10조원 목표
HVAC는 난방과 냉방, 환기 등 실내 공기질 관리를 뜻하는 공조를 아우른 개념입니다. 경동나비엔은 콘덴싱 하이드로 퍼내스가 물과 공기의 열교환으로 따뜻해진 공기를 실내에 공급하므로, 공기 질이 쾌적하고 난방도 안정적이라고 자신합니다.
세계 HVAC 시장 규모는 320조원에 이릅니다. 이에 다이킨과 캐리어 등 HVAC 전문 기업 외에도 여러 가전 기업이 시장 경쟁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경동나비엔은 콘덴싱 기술 기반으로 미국 온수기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듯이, HVAC 시장에서도 친환경·고효율로 시장 변화를 주도하려 합니다. 올해 6월~8월쯤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할 계획입니다. 최신형 인버터 압축기를 적용한 ‘히트펌프’를 콘덴싱 하이드로 퍼내스와 연계해 냉난방을 함께 제공합니다.
김 부사장은 "북미 주요 냉난방 시장인 HVAC 시장에 진출해 2025년에 매출 2조원, 2032년에 10조원 목표를 세웠다"고 밝혔습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아도 망가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해외는 한국처럼 촘촘한 서비스망 구축이 어렵습니다. 김 부사장은 "2008년 미국에 온수기 2만대를 수출한 뒤, 안전상의 문제가 우려돼 수백억원을 들여 리콜했다"며 "설비업자들에게 품질에 대한 진심을 전달한 점이 지속 성장의 동력이 됐고, 이후 품질이야말로 흥망성쇠의 열쇠임을 모두 깨닫고 품질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원칙을 세웠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살펴본 가스조립동에서는 비전심사로봇이 55개 항목을 찍어대며 1차 점검을 했고, 검수 담당자들도 제품에 불을 쏘며 가스 누출 위험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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