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탈출'의 시대다.
지난 몇년 간 '코로나 블랙홀'에 흡착됐던 대중음악, 공연 시장은 이제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2년 간 약 90% 감소했던 공연 매출은 올해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팬데믹 직전 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올해 역대 최다 관객수를 갈아치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과 아이유 잠실 주경기장 공연, BTS 부산 콘서트는 그 증명의 현장이었다. 빌리 아일리시부터 잭 화이트까지 그간 한국 땅을 밟지 못했던 해외 팝스타들의 대규모 내한 공연도 재개되며 활기를 불어넣었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KEXP 등 해외 음악신에서 주목받는 관계자들은 서울, 울산을 부지런히 오가며 한국의 독특한 음악가들을 매의 눈으로 포착해 갔다. 임윤찬은 세계 정상급 콩쿠르를 잇달아 석권하며 한국 클래식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다.
가려져 있던 장르 음악에 해사한 빛줄기가 새어 든 해다. MZ 세대 중심으로는 신 재즈 문화가 피어났다.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세기를 횡단한 엘라 피츠제럴드의 한 마디가 수천개의 밈 콘텐츠로 확대, 재생산됐다. 신중현과 산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이키델릭 록 음반, 뽕짝 문화를 힙합, 전자음악과 교배한 실험작이 곳곳에서 나왔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굵직한 자취를 돌아본 해이기도 했다. 데뷔 45주년을 맞은 산울림의 'LP 리마스터링 프로젝트', 송골매의 40년 만의 재결성 무대,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데뷔 30주년이 모두 올해 있었다.
이 뿌리로부터 이어진 'K팝 DNA'는 BTS, 블랙핑크, 뉴진스로 뻗어나가며 세계 대중문화 흐름을 선도했다.
세계는 여전히 회중시계를 지닌 토끼를 쫓듯 한국 음악을 궁금해한다. 토끼는 검은 분칠을 하고 더 큰 퀀텀점프를 뛸 수 있을까. 10개의 키워드로 2022 음악계를 정리한다.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관객들. 사진=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코로나 블랙홀' 탈출 공연 시장…올해 매출 8000억 전망
'코로나 블랙홀'에 빨려가던 대중음악계는 올해 하반기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반기부터 시작된 급격한 회복세가 이미 수치로 나오고 있다. 지난 7일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 공연시장 티켓 판매액은 약 1411억원으로 집계됐다. 1분기 약 796억, 2분기 약 1244억원에 이어 계속 증가세다. 통상적으로 7~8월은 한여름 더위 때문에 '비시즌'이라 불리지만, 올해는 이례적 실적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아직 4분기 매출이 정확히 잡히지는 않고 있지만, 2019년을 넘어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을 기준으로 올해 1월~9월 공연티켓매출액은 약 3451억원으로 집계됐다. 2019년 같은 기간 공연티켓매출액 약 2692억원에 비해 759억원 많은 규모다. 성수기인 연말까지 두고 봐야겠지만, 전체 공연 시장규모가 8000억원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현재까진 우세하다.
팬데믹 기간은 같은 공간에서 대중과 밀착 소통해야하는 대중음악, 공연 시장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알려준 계기였다. 공연 매출은 지난 2년간 90% 감소했고 음향·조명·악기를 비롯한 공연업계·중소 레이블과 기획사는 고사 직전에 몰리기도 했다. 그간 한국대중음악공연산업협회(이하 음공협),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Liak)를 주축으로 정부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댄 자리들이 여럿 열렸다.
대중음악 공연에 대한 정부의 부당 차별 반대, 경영위기업종 아닌 영업제한 업종 분류 요구, 공평한 지원과 손실보상 적용 등에 대한 의견이 나왔으나 실질적인 성과가 무엇이 나왔는지 자문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팬데믹 같은 재난 상황에 시스템이 얼마나 갖춰져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 등의 활동이 있는 대형 기획사 소속 가수들과 달리 공연 활동이 주가 되는 국내 장르 음악가들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공연으로 번 수익으로 다음 앨범 제작비를 마련하는 식의 ‘현금 흐름’ 자체가 끊겨 버려서다. 올해 코로나 전 만큼 다양한 앨범 제작이 힘든 원인이기도 했다. 다행히 하반기부터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영향은 여전하다.
코로나 블랙홀에서 빠져나온 것은 세계 대중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올해 영국의 세계적인 음악 축제 '글래스톤베리'에는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무대에선 존 레논의 생전 영상을 틀어준 무대는 역사적인 공연으로 남게 될 것이다. 사진=AP·뉴시스
역대 최다 관객 동원 '펜타포트'…BTS 부산 콘서트·아이유 잠실 공연
올해로 17년째를 맞은 국내 대표 음악 축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하며 상징성을 지켰다.
팬데믹으로 지난 3년 간 야외에서 진행되지 못한 만큼, 올해 관객들의 열기는 예년보다 뜨거웠다. 주최 측에 따르면 3일 간 총 13만명이 다녀가, 서태지가 출연했던 2015년(12만명) 기록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사골' 라인업(이전 출연한 뮤지션들의 재출연), 행사 본 취지와 상관 없는 프로모션 부스 섭외, 운영 미숙 등의 지적은 올해도 있었지만, 팬데믹 영향에도 국내외 내실 있는 팀들을 포진시켜 선방했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넬, 자우림, 뱀파이어 위켄드, 재패니스 브렉퍼스트, 데프헤븐, 타히티80, 세이수미, 이디오테잎, 크라잉넛, 잔나비 같은 팀들이 무대에 올랐다.
올해 9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아이유의 단독 콘서트 '더 골든 아워(The Golden Hour) : 오렌지 태양 아래'에서는 거대 벌룬이 날았다.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꿈의 무대'로 통하는 잠실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사진=EDAM엔터테인먼트
펜타포트를 기점으로 코로나 기간 쪼그라들었던 대형 대중음악 축제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자라섬 페스티벌'과 'DMZ 피스트레인', '부산 록 페스티벌', '월드디제이페스티벌', '뷰티풀민트라이프', '서울재즈페스티벌', '슬로우라이프슬로우라이브' 등이 팬데믹 이전처럼 관객들과 만났다.
올해를 상징할 만한 국내의 의미있는 무대들도 여럿 있었다. 가수 아이유는 9월 국내 여성 가수 최초로 잠실 주경기장 무대에 섰다. 10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차 열린 방탄소년단(BTS) 부산콘서트는 전 세계 229개 국가에서 동시 시청(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오프라인 5만명)하는 기록을 세웠다. 억대에 달하는 투자액으로 천여개의 아크릴 창작 조명과 블레이드 연출을 선보인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는 숨겨진 '올해의 공연' 가운데 하나였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빌리 아일리시부터 블랙미디까지, 부활한 내한 공연
8월, 그래미 본상만 9개(총 그래미 16관왕)를 싹쓸이한 빌리 아일리시가 고척돔 무대를 휘저으면서, 본격적인 팝스타들의 내한 단독 공연이 재개됐다.
빌리의 공연은 지금 세계 음악신에서, 가장 세련된 록 기반 음악이 무엇인지 여실히 증명한 무대였다. 친오빠 피니어스 오코넬(기타와 건반), 드러머 앤드류 마샬이 음반 원곡의 악곡을 다이나믹한 록 사운드 특유의 스케일 큰 음향으로 증폭시켰다. 힙합과 알앤비, 그리고 발라드까지 영역을 확장한 록 사운드의 이 뮤지션을 왜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21세기 너바나'라고까지 부르는지 이 1시간 반 가량 라이브가 입증했다.
빌리를 듣는다는 것은 패션의 영역까지 넘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투톤컬러와 세기 말 록스타들의 메탈 티셔츠를 입은 Z세대들의 군열은 지금 현상이다.
그간 한국을 찾지 않았던 해외 록, 팝스타들의 진경이 돋보였던 해였다. 영국 레스터(Leicester)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이지 라이프(Easy Life)'는 기타와 키보드의 멜로디 파트,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파트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힙합·소울풍의 세련된 록 미장센을 보여줬다. 팬데믹과 전쟁으로 물든 세계와 세계인을 위한 '마음 챙김' 같은 시간을 선사한 라우브의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슬라슬라)' 마지막 무대도 빼놓을 수 없다.
21세기 '록의 전설' 잭 화이트는 11월 솔로로 첫 내한 단독 공연을 열었다. 그래미를 석권한 록 듀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주요 히트곡을 비롯해 솔로 활동과 병행 밴드 래콘터스, 더 데드 웨더 곡들을 아우른 자리다. 영국의 떠오르는 익스페리멘탈 록 밴드 블랙미디는 12월 롤링홀을 영국으로 만들었다. 소주병으로 베이스를 때리듯 연주하는 이색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을 광란에 빠뜨렸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두 번째 내한 단독 공연을 연 빌리 아일리시. 사진=현대카드
글래스톤베리, KEXP라이브…'한국 디깅' 하는 해외 관계자들
지금 해외 음악 관계자들은 한국을 '디깅'(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내는 작업) 중이다. 궁금증은 '케이팝, 그 다음은?'이다. 지난 9월 울산 에이팜에서 만난 글래스톤베리 기획자 스티브 사이먼즈는 본보 기자에게 "한국 음악가들은 분명 세계 음악 시장에서도 독보적이다. 전통적인 의복과 악기를 팝 음악에 결합해내는 시도들을 특히 눈 여겨 보고 있다"고 했다.
한국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을 세 차례(2014·2015·2019년) 초청했던 말콤 헤인즈, 한국 매스록 밴드 코토바(2020년)를 섭외한 마틴 엘본 등 글래스톤베리 내 다른 기획자들과도 교류한다는 그는 "한국 밴드 이날치를 글래스톤베리 무대에 올리는 것이 내 최종 목표"라 했다.
같은 행사에서 만난 시카고월드뮤직페스티벌 큐레이터 데이비드 차베즈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동양적인 전통 음악을 서양의 현대성과 결합하는 방식 자체가 신선하다는 것이다. 차베즈는 이 행사에서 열린 줄 헤르츠, 상자루 등의 공연을 인상깊게 봤다고 했다.
코로나가 서서히 걷히면서 올해는 하반기 울산 에이팜을 비롯해 해외 관계자들이 한국의 여러 장르 음악을 탐험할 수 있는 행사들이 여럿 열렸다.
9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저니투코리안뮤직(Journey to Korean Music)'에는 KEXP의 DJ이자 공동창업자인 다렉 마조네 홀리데이가 연사로 나섰다. 기자와의 인터뷰 당시 그는 "BTS가 선도하는 K팝 문화를 보면, 글로벌 음악 시장의 동향이 소셜 팬덤을 위주로 빠르게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서도 "한국에도 다양한 장르 음악이 발달돼 있는 것에 관심이 간다. '너바나' 같은 록 밴드를 KEXP 무대에 세워보고 싶다"고 했다.
클래식 분야도 이제는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올해 6월,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우승한 임윤찬을 필두로 K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 커졌던 해다.
지난해 KEXP 라이브 무대에 오른 악단광칠. 이에 앞서 2020년에는 부산 출신의 서프록 밴드 세이수미가 이 방송에 출연했다. 사진=KEXP라이브 유튜브 캡처
'재즈란 무엇인가', MZ 세대 중심 이상 열풍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멜 토메(1925~1999)가 묻고 엘라 피츠제럴드(1917~1996)가 스캣으로 답한 영상은 세기를 횡단해 올해 MZ 세대를 달궜다. 유명 만화가 주호민(40)과 이말년(40)이 개인방송에서 특유의 개그코드로 멜과 엘라를 따라한 것이 계기다. 이후 열기가 20~30대 젊은 층으로 전이돼 밈으로 번졌다.
90년대 차승원의 색소폰, 2016년 라라랜드에 이어 재즈계는 "유례없는 호재"라며 반색했다. 애초 예술 장르로 대중화가 쉽지 않은 재즈를 친근한 일상의 음악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난 3년 간 한국 재즈계는 위기였다. 지금은 폐업한 홍대 팜, 압구정 원스인어블루문(블루문)을 비롯해 부산 몽크처럼 잠정적으로 영업을 중단한 곳들이 적지 않다. 상징적인 재즈 공간들이 하나 둘 스러지는 상황에도 최근 재즈계에선 결속을 다지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20~30대 젊은 연주자들 중심의 프로젝트 밴드 ‘한국재즈수비대’는 유튜브 콘텐츠(채널 ‘재즈에비뉴’와 협업)를 제작하며 재즈 부흥을 독려하고 있다. 한국의 신 재즈 문화 중심에 선 공로로 올해 초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도 수상했다.
웅산 한국재즈협회장을 필두로 김준, 신관웅 등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은 후배 세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노들섬 '서울재즈페스타'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정식(색소폰)·김희현(드럼)·장응규(베이스)·양준호(피아노)는 27년 만에 '서울재즈퀄텟' 재결성 무대도 가졌다.
‘요원한 과업’ 같던 재즈의 일상화, 대중화가 숏 콘텐츠와 밈 등 뉴미디어의 확산과 발전을 타고 이제 MZ 세대들에게로 전해진다. 단순히 배경음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오스카 피터슨의 연보와 음악 세계를 뒤지는 '찐(진짜)' 재즈 팬들이 늘고 있다.
멜 토메(1925~1999)와 엘라 피츠제럴드(1917~1996)가 1976년 제1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펼쳐진 전설의 스캣 대결 영상은 지금 MZ 세대 밈 놀이로 전이되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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