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40대 중반을 넘어가자 노년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남들은 연금 넣고 주식 투자하며 척척 해놓던데 아직도 매달 벌어 매달 쓰는 인생에 노후 준비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 그러다 생각한 게
“책을 내볼까
”였다
. 내 후배 기자로 입사했던 아내가 이미 책을 여러 권 낸 프로작가가 된 마당에 나라고 못할 쏘냐 싶었다
. 주말 저녁 동네 단골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거창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정해진 것도 없이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쓰다 보니 제법 그럴싸한 글이 나오는 것 같다
. 그래
. 이게
20년 넘은
‘글 밥 위력이다
’며 자화자찬 늪에 빠졌다
. 그런데 막상 두 시간 정도 써내려 간 글을 읽어보니 도대체 이게 뭔 얘기인가 싶다
. 집에 와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같은 말을 한다
. 왜 이런 거지
.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
풀이 죽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위축돼있는 내게 아내가 말한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이 많아 그렇다? 생각하지 말아 볼까. 그런데 그게 가능 한가. 그렇게 또 다시 생각을 둘러싼 생각의 늪에 빠져있을 때 무심히 열어본 핸드폰 속 인터넷에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제목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다. 책 소개를 읽어봤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책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멍 때리기’의 법칙,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비움’의 미학을 얘기하고 있었다.
비움이라. ‘비움’이란 단어가 자꾸 맴도는 걸 보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간신히 끊었던 담배 한 모금이 아니라 비워내는 작업인 듯 했다. 다음 주말이 되자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혼자 카페로 향했다. (아이 둘 키우는 유부남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노트북은 가져오지 않았다. 핸드폰도 꺼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커피만 홀짝이며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단골 카페 사장님도 조금 의아한 눈치다. 항상 전투적으로 노트북 두드리고 큰 소리로 쉴새 없이 전화 하던 양반이 오늘 왜 저러나 싶은 눈치다.
설 연휴가 지나고 다소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던 주말 오후였다. 삼삼오오 거리를 거니는 커플들이 많았다. 젊음이 보기 좋다. 유모차에 어린 자녀를 태우고 동네 산책을 나온 가족도 눈에 띈다. 10년 전 우리 가족을 보는 듯 정겹다. 환기를 시키려는지 사장님이 잠시 창문을 열었다. 벌써 봄인가 싶은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일순간 나를 중심으로 시공간이 팽창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너무 달려왔구나. 달리기만 했구나. 가장의 삶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운 듯싶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가정 상황으로 인해 내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부담감에 억눌려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동안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더니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다. 나는 내려놔야 할 것 같다. 더 많이 내려놓고 더 많이 비워내야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더 좋은 것이 쌓일 수 있을 것이다. 60세 이후 찬란한 노년기를 위해 40대의 나는 비워내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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