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반 무렵. 코로나 백신을 맞고 나왔다. 뜻밖에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아파트 담벼락에 핀 능소화였다. ‘하늘을 능가하는 꽃(凌?花)’이란 뜻에 어울리게 참 예뻤다. 가지에 흡착근이 있어 벽에 붙어서 올라가는 습성 탓일까, 마치 빨판처럼 착 달라붙어 아파트 울타리를 양다리로 걸친 듯한 풍경이었다. 십여 미터나 되는 동양화 한 폭을 울타리 양쪽으로 펼쳐놓은 듯 아름다웠다.
백신 맞은 사실을 잊은 듯 그 꽃에 시선을 뺏기는 동안, 만약에 어느 여인의 얼굴이 이 꽃을 닮았다면 하늘의 질투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되는 혹서로 지나가는 바람도 뜨거웠다. 열풍이 꽃 속으로 숨어 들어갔을까. 하나둘, 꽃 이파리가 흔들리고 있었고, 담벼락 아래에는 떨어진 꽃잎도 몇 장 있었다. 낮에 보았던 그 능소화가 쉬 잊히지 않는 밤. 열대야는 여전히 생생하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안전안내 문자’가 쌓여 있었다. “(서울시청) 07.30. (금) 00시 기준 서울시 신규환자 488명 발생. 자치구별 현황 및 동선 등은 bityl.co./617T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화 120.”, “(행정안전부)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외출 자제, 그늘에서 휴식, 수분 섭취, 온열질환 의심 시 119에 신고하고 시원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서울경찰청) 노원구에서 실종된 이예성(여, 13세)을 찾습니다. 160cm, 48kg, 검정긴팔점퍼, 면바지 vo.la/HFCe5/전화 182.” 등등, 여러 개의 문자가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안전안내 문자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오늘 밤은 좀 더 유심히 읽었다. 안전과 관련된 재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법.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할 때쯤, 코로나 백신을 맞은 왼쪽 팔이 조금은 뻐근하다, 혹은 약간 아프다, 그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참가해서 많은 친구들과 소통을 하고 있는 이른바 ‘단톡방’ 몇 곳에는 접종이 시작된 7월 26일부터 백신을 맞은 친구들의 백신 접종 수기가 올라와 있었다. “접종 후 후암시장 미니네 칼국수에서 콩국수 한 그릇하고 사무실 복귀 중입니다.”, “방금 화이자 백신 맞고 집에 왔음. 아무런 증상 없고 홀가분함.”, “나도 화이자 백신 접종 완료. 약간 땀나는 건 더워서 그런 거겠지?”와 같은 소식을 알려주는가 하면, “백신 맞는다고 준비하고 있었더니 예약이 안 됐다고 하네. 병원, 날짜, 시간까지 지정해서 클릭했는데......이게 뭔 일? 추가예약도 안 되고, 잔여 백신 신청하라네.”처럼 백신 불발을 아쉬워하는 글도 눈길을 끌었다.
더불어, 백신 접종 후 열이 나는 증상을 염려하여, 어느 친구는 “예전 어느 기사에는 ‘애드빌, 부루펜 등, 소염진통제 항체 형성 억제. 접종 후 발열 · 통증 자연스러운 면역 체계 반응. WHO, 접종 뒤 꼭 필요하면 타이레놀이 안전”과 같은 문장을 나열하며, 백신 접종이 처음인 친구들에게 ‘코로나 19백신 접종 후 진통제 찾는 팁’을 소개한 영상도 올렸다. 친절함과 배려가 느껴진다.
대구에 사는 친구는 모더나 백신을 맞았다며, “모더나 접종 후 한숨 자고 일어났습니다. 모두 무탈하시고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십시오.”하는 안부 문자를 보내왔다. 경기도 시흥에 사는 친구는, 자기는 모더나 백신을 맞았다며, 수도권은 화이자 맞는 줄 알았는데......“라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렇게 2021년 7월, 그 마지막 주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구애를 외치는 매미 소리가 더운 바람을 타고 들어올 것만 같은 밤. 텔레비전에서는 한국의 양궁 선수 안산의 금메달과 펜싱 선수들의 동메달 획득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선수들의 감동적인 모습에 열대야가 조금씩 뒷걸음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열정이 우리에게는 무더위를 이겨내는 청량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영업자의 비명, 지난 6월에 식당·숙박업 종사자들 전년 동월 대비 5만 명 넘게 감소”, “서울 아파트 전세, 약 1년 만에 최고 상승률 기록”, “미국 연준, 테이퍼링 본격 논의 시작. 조만간 고용시장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 등, 국내외 경제를 둘러싼 불안과 희망을 타전하는 뉴스들도 식지 않는 혹서의 밤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낮에 본 능소화가 그리워졌다. 아파트 울타리를 넘어가는 꽃의 가지처럼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