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해질녘 일이다. 저녁 겸 반주를 위해 막걸리 한통을 사러간 마트에서 오랜만에 지인의 가족과 마주쳤다. “그래 너 올해 몇 살이니, 옜다. 공부 열심히 해라.” 어쩌다 마주한 자리였으나 어찌나 반갑던지, 지인 자제에게 푼돈을 주어주며 건넨 덕담이다.
세상일에 정신없이 살다보니 불혹을 훌쩍 넘어선 40대 후반. 집안 어르신들을 통해 익힌 용돈 풍습은 관례이자 의례처럼 몸에 베여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손주들에게 그랬고, 집안어르신들이 어린 조카들에게 그러했다.
‘해마다 기억도 못하는 내 나이를 왜 묻곤 할까.’ 당시 어린 나에게 되묻던 물음 뒤로는 제법 쏠쏠했던 용돈 벌이가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요즘 풍토는 인쇄 지폐로서의 가치보단 세균 덩어리로 치부된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껄끄럽기는 매한가지다. 불연 듯 생각해보니 그날 마주한 지인도 난감 했을 듯 싶다. 딸아이에게 지폐는 더러우니 만지지 말라고 가르치던 나였다.
코로나 팬더믹 때는 더더욱 꺼림칙한 것이 당연지사다. 현금으로만 조문을 하던 장례식 문화도 ‘조문 사절’, ‘계좌이체’가 대부분이다. 숫자로만 오갈 뿐, 코로나로 화폐사용이 줄면서 위조지폐도 역대 최저를 기록할 정도다.
머지않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등장할 경우 돈을 찍어내는 한국조폐공사로서는 조폐역사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자조섞인 말까지 나온다.
그러는 사이 실체도 알 수 없는 인물인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엘살바도르까지 달러화를 버리고 비트코인을 택하는 분위기다.
갈길 잃은 2030세대도 암호화폐에 뛰어드는 등 ‘변동성이 큰 위험 투자’라는 당국의 말에도 불나방을 자처하고 있다. 투기꾼을 먹잇감으로 한 코인 시장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시바견 심볼의 코인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의 열두 척 배에서 영감을 얻은 코인, 김치 코인 등 거래소만 200곳으로 우후죽순이다.
특히 상한가 하한가의 주식시장과 달리 일명 레버리지를 감수한 투자자들의 폭락은 여기저기 곡소리다. 이른바 튤립버블, 미시시피 버블 등과 유사한 현상처럼 투기 광풍이 시장을 빠르게 강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는 3년 전부터 코인 시장의 문제를 방관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물론 뒤늦게나마 정부도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 가상자산 거래소를 등록제로 문제가 될 만한 곳과 탄탄한 곳을 공시해 투자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양성화하는 데 포커스를 두고 있다. 다단계회사가 등록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부는 암호화폐에 대해 ‘가상자산’으로 칭하고 있다. 즉, 자산으로서는 인정하겠지만 화폐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CBDC가 나오기까지 거듭될 혼란은 불가피하다.
속성없는 가상자산은 게임 머니와도 같다. 내재적 가치를 운운하는 이들의 오류는 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을 혼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블록체인은 어디까지나 돈이 아닌 위조방지 기술이다.
코인의 광풍은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는 돈의 속성과도 닮아있다. 코로나로 더욱 벌어진 양극화와 불평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관계부처 서로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규하 경제부장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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