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2013년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제도를 도입했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와 융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나아가서는 미국의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투자은행을 한국에서도 육성해 보겠노라고 의욕을 보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종투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2017년 발행어음을 팔아 자금을 조달하도록 허용했다. 2018년엔 신용공여 한도를 자기자본 100%에서 200%로 확대해줬다.
지금까지 한국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 KB증권, NH투자증권, 삼성증권, 미래에셋대우증권, 메리츠증권, 하나금융투자 등 8개사가 종투사 인가를 받았다. 이 가운데 KB, 한투, NH, 삼성, 미래에셋대우 등 5개사는 2017년 11월 4조원 이상의 자본금을 확보해 '초대형투자은행(IB)'으로 승인받았다. 특히 한투, NH, KB는 발행어음을 통한 단기금융업도 승인받았다.
모두 오랜 사업경험과 자본을 보유한 중량급 증권사다. 이들 중량급 증권사에 자유롭게 뛰어놀고 비상해 보라고 도약대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 중간성적표가 최근 제시됐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종투사가 공여한 신용은 총 35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그 내용이 부실하다. 기업에 제공된 신용은 14조3000억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기업 신용 가운데 중소기업에 제공된 것은 7조4000억원으로 전체의 절반에 조금 넘는 데 그쳤다. 또 부동산 법인에는 6조원이 제공된 반면 순수한 기업 공여액은 2809억원에 불과했다.
결국 투자은행 육성이라는 당초의 목표는 껍데기만 남은 꼴이다. 모험자본 공급 등 위험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는 투자은행 본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부동산 사업 등 비교적 손쉬운 투자나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한국형 골드만삭스'는 언감생심이다.
더욱이 일부 증권사는 정부가 마련한 인센티브를 악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국투자증권은 2017년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최태원 SK회장의 SK실트론 지분 매입자금 1700억원을 대출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SPC는 최 회장과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맺고 있었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초대형 투자은행으로 승인받은 증권사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기업금융에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투자증권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최태원 회장 개인에게 부당대출했다고 금융감독원은 판단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2016년 계열사인 베트남 현지법인에 399억원을 1년 동안 대여한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한투증권은 금융당국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징계는 적지 않은 논란 끝에 비교적 가볍게 끝났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형 투자은행'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정부의 허술함도 한몫했다. 애초에 투자은행 육성을 목표로 했다면 개인에게 흘러들어갈 여지가 있는 대출이나 부동산 업체에 대한 신용공여는 원천적으로 막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제한 없이 방치했다.
정부는 뒤늦게 지난해 12월 내놓은 증권사의 부동산투자 건전성 관리방안을 통해 종투사의 신용공여 대상에서 부동산관련 대출을 제외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아직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러려고 종투사 제도를 도입했는가 하는 의구심만 커진다. 정부나 종투사로 지정된 증권사에게 '한국판 골드만삭스'로 도약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런 의지가 없다면 정부가 아무리 자유를 주고 인센티브를 부여해도 소용이 없다. 그 자유와 인센티브가 선용되지 않고 엉뚱하게 남용될 가능성이 크다.
덧붙이자면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의 종투사에는 외국환업무도 허용된다는데, 사실 위험해 보인다. 과거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종금사 사태처럼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금감원도 "종투사로서 제공받은 인센티브에 상응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이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렇지만 부분적인 개선만으로 애초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자의 말씀처럼 썩은 나무에는 대패질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종투사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종투사에 주어진 자유와 인센티브를 회수하고, 진정으로 혁신의지가 있는 업체를 다시 찾아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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