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국내 주요 기업집단 시가총액이 폭락해 자본이탈 공포가 번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무색하게 삼성을 중심으로 자본이 대거 이탈하는 모습입니다. 그 속에 국내 개인투자자가 해외증시로 빠져나가는 모습도 두드러집니다. 정부는 배당감세로 귀결된 밸류업 정책을 내놨지만 효과가 없는 상황에서 기업집단의 지배구조 개선 등 구조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됩니다. 이런 배경 아래 야당은 이사회 투명성 제고 골자인 상법 개정안을 꺼냈는데 전처럼 여당이 반발합니다.
삼성에 SK·LG·현대차도 줄줄이 폭락
15일 장중 코스피는 3개월 만에 2400선을 하회하고 코스닥은 1년 11개월 만에 670선을 내줬습니다. 이날을 포함해 증시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위기설이 불거진 삼성의 낙폭이 크고 여타 그룹도 폭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시총은 기업공개(IPO)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기업 자금조달 창구임을 고려할 때 증시 폭락으로 국내 경제에 미칠 타격도 우려됩니다. 일례로 근래 부채자본시장에서 발행량이 커진 신종자본증권은 채권의 주식전환이 가능한 전환사채와 유사한 성격을 띠는데,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의 채무변제능력이 부실화되면 스텝업(금리인상)과 조기상환(콜옵션) 문제가 꼬여 디폴트(채무불이행)사태로 번질 수 있습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굳이 유상증자나 주식 관련 사채가 아니라도 가장 보편적인 자금조달 수단인 채권 역시 주식가치와 연결된 신용보증 등에 얽혀 있다”며 “최근 주가관리에 매달리는 경영진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진다”고 전했습니다. 또다른 관계자는 “주가가 급락하면 당장 대출상환(리파이낸싱) 여건부터 열악해진다”고 했습니다.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5월27일) 전 5월17일 종가 기준으로 삼성그룹 시총은 662조였습니다. 이달 14일 종가 기준 시총은 487조원입니다. 6개월새 175조원이나 증발했습니다. 코리아밸류업지수 출범(9월30일) 후 10월9일 종가 기준 삼성그룹 시총은 565억원이었습니다. 이후 전날까지 한달 남짓한 사이에도 78조원이나 빠졌습니다. 이는 실적 사과문까지 발표한 삼성의 위기설과 무관하지 않지만 삼성주가만 부진한 게 아닙니다.
같은 기간 SK그룹은 5월 이후 17조원, 최근 한달새 10조원이 감소했습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을 중심으로 사상 최대 3분기 영업이익도 거뒀지만, 그룹시총을 방어하진 못했습니다. LG그룹도 동기간 각각 3조원, 12조원씩 폭락한 흐름을 보였습니다. 현대차그룹은 14조원, 10조원씩 시총이 사라졌습니다.
이날 장초 기준 한국거래소가 공시한 코리아밸류업지수를 보면, 상위 10종목이 거의 시가총액 순서대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기아 순인데 근래 하락장을 주도했던 증시종목과 지수가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게다가 10종목 안엔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폭등한 고려아연이 포함돼 장기투자를 권장하는 밸류업지수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도 보입니다. 밸류업은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됐는데, 고려아연의 경우 금감원이 기습 유상증자에 따른 불공정거래 여부를 조사하는 터라 더욱 이질감이 있습니다. 이처럼 지수 발표 후 줄곧 종목구성에 대한 논란도 많았습니다.
헛다리 짚은 밸류업…“지배구조가 문제”
야당은 국내 증시의 심각성을 고려해 금투세 폐지에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하락추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사충실의무 강화 등 상법 개정을 추진해 코리아디스카운트 근본 문제를 바꾸겠다는 방침입니다. 하지만 주요 경제단체들이 경영활동 위축과 이사회나 경영진에 대한 소송남발 우려를 들어 반발했고 여당도 이런 의견에 동조하며 반대하는 상황입니다. 앞서 기업집단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부안도 언급됐었는데 한달반 넘게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시행령을 고쳐 한다던 인적분할 시 자사주 활용 금지 방안도 총선을 넘기자 표류하며 포퓰리즘 논란을 사고 있습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엑소더스 원인은 자본시장에 대한 불신”이라며 “투자에 성공해도 투자수익을 걷기 어렵다는 개인투자자들의 자본시장 불신이 커졌다. 그래서 한국을 벗어나 일본, 미국 등 해외 주식시장으로 많이 빠져 나갔다. 예를 들면 2차전지가 유망하다고 해서 투자해 성공도 했는데 막상 투자수익을 환수할 때쯤 별도 자회사 물적분할한 다음 별도 상장해버리니까 미래 성장사업을 잃어버린 LG화학이나 SK이노베이션 주가는 급락했고 주주들이 피해 본 사례가 있었다. 또 윤석열정부가 원전사업을 한다고 해서 원전시설 투자하는 유일한 (민간)회사인 두산에너빌리티에 투자해 체코원전 호재도 있었지만, 거기서 유력한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떼어내 다른 데 합병한다고 하니까 예측하지 못한 피해를 본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김 의원은 이어 “두산에너빌리티 주주연대 대표도 한국증시에 불신이 있어 90% 이상 해외 투자해오다 원전사업한다고 해서 유일하게 국내 투자했는데 전혀 예측하지 못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나 같은 투자 전문가도 피해를 보는데 한국 주식시장에서 일반적인 투자자들이 어떻게 정상적인 투자수익을 볼 수 있겠냐’는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며 “2015년 미국에 개인투자한 게 18억달러 정도였는데 2022년 말엔 920억달러 정도, 50배가 될 정도다. 불신으로 인해 해외 이탈한 게 주된 원인이고 외국인투자자들도 그런 형편으로 떨어질 땐 폭락하고 오를 땐 거의 안오르는 상황이 됐다. 다른 나라와 주식격차도 커져 코리아디스카운트가 훨씬 심각해졌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자위 소속 박지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금투세가 조세정의 측면에서 필요하지만 국내 증시가 너무 안 좋으니 폐지하게 됐고 대신 상법 개정을 약속한 것”이라며 “소액주주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게 기업 지배구조 측면에서 문제가 있고 그래서 빠르게 상법 개정하자는 취지로 국장활성화TF도 만들었다. 상법 개정 중 우선할 것이 이사충실의무에 주주이익을 고려하도록 하고 집중투표제를 실시해서 소액주주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게 하는 것, 사외이사 역할을 강화하는 3가지 방향이며 이를 당론으로도 채택했다”고 했습니다.
박 의원은 또한 “최근 삼성전자도 4만원대로 떨어졌었는데 개별회사 일로 볼 수 있지만 워낙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증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개선하는 데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그동안에도 수차례 (국회서) 동의됐었다. 지금이야말로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당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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