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심정으로 기부를 결정했습니다.” 여성 사업가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 23일 한국과학기술원에 자신이 평생 일군 재산 676억 원을 발전 기금으로 내놓으면서 한 말이다. 그는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카이스트에 90억 원가량의 기부를 한 바 있다. 카이스트는 이 회장의 기부금으로 설립하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카이스트 싱귤래리티 교수’를 육성할 계획이다. 카이스트 싱귤래리티 교수 제도는 과학적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사회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 등을 선발·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올해 83세인 이 회장은 언론인 출신의 사업가이다.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3년 『서울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서울경제신문』에서 일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됐다. 그 뒤 양돈사업과 부동산 등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이런 특이한 이력 외에도 줄곧 독신으로 지내다 2년 전 첫사랑이었던 대학 동창과 결혼해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가 내놓은 금액이 엄청난데 놀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이보다는 과학계에 몸을 담은 적이 없는 비과학자 출신이 노벨 과학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엄청난 액수의 기부를 결심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가 7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카이스트에 내놓았다는 것은 삼성, 엘지, 에스케이 등 재벌 총수가 수조 원 내지 수십조 원을 자식이 아닌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내놓는 것에 해당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런 사고와 행동을 하는 재벌이 없다. 오로지 대물림에만 관심을 쏟아왔다.
이 회장이 이런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말 의미가 크다. 하나는 우리 사회 부자들의 기부 문화를 성찰하게끔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입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선진국들에 견줘 크게 모자라는 것이 바로 갑부들의 기부 문화와 노벨 과학상 수상이다. 서민들이야 기부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재산이 없어서라는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수백억 원 이상의 자산가들도 수두룩한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사회 기부보다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는데 골몰하고 있다. 기부를 하더라도 대부분 장학재단 등으로만 내놓지 과학기술 입국 목적으로 내놓은 경우는 희귀하다. 이 회장의 기부가 정말 뜻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최초의 노벨 과학상’을 들먹인 것은 꼭 노벨상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의 위상을 드높이는 과학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노벨 과학상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집계한 것을 보면 2019년까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등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미국이 267명으로 단연 으뜸이고 이어 영국 88명, 독일 70명, 프랑스 34명, 일본 23명, 스웨덴과 스위스가 각각 17명, 네덜란드와 러시아가 각각 15명, 캐나다 11명, 오스트리아 10명 등으로 나타났다. 물론 우리는 단 한 명도 없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많은 것과 그 국가의 지금 과학 수준이 꼭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수상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과학 수준이 높다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 몇몇 분야의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많은 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과학 기초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운동에서 기초 체력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듯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 수준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라톤과 같다.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기초 체력이다. 좋은 기록으로 완주 내지는 우승을 거머쥐려면 기초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따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 계속해서 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벨 과학상 수상도 그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과학은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핵심이다. 과학을 빼놓고 국가와 인류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 없다.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 그리고 일반 시민 모두에게 중요하다. 이수영 회장이 죽비로 이를 내리쳤다.
안종주 단국대 초빙교수·보건학 박사(jjahn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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