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재발견 29화)예카테린부르크에서 던진 질문
2020-07-27 08:00:00 2020-07-27 0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어떤 전통의 계승
 
이르쿠츠크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2박 3일의 마지막 날, 튜멘 역에 도착했다. 예카테린부르크가 가까워지고 있다. 모두 바람을 쐬는 시간, 우리 칸 담당 승무원인 레나가 나를 불러 옆에 선 다른 승무원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르 마트베예프 씨, 그 역시 바이칼 국립대 치타 대학 학생으로 레나와 나타샤처럼 승무원으로 일하는 학생이다. “혹시 한국 돈을 갖고 있나요?” 알고 보니 그의 취미는 세계 각국의 화폐 수집, 갖고 있던 천 원짜리를 건네주니 루블로 얼마에 해당하는지 묻고는 교환해 주려 한다. “기념이니 그냥 가지세요.” 수집용으로 교환할 액수치곤 좀 과했다 싶었는지 잠깐 놀랐던 그에게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수집 목록에 퇴계 이황 선생이 들어가셨으니 내게도 즐거운 일이다.
 
세계 각국의 화폐를 수집하는 학생-승무원 알렉산드르 씨가 한국 지폐를 받고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최근에 나타샤가 전해 준 소식에 의하면, 그녀들의 선배였던 사샤(알렉산드르)는 졸업을 해―전공과는 거리가 멀지만―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정식 승무원이 됐다. 2학년이었던 나타샤와 레나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이번 학기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지 않고 모두 취소됐다고 한다. 이들이 철도 승무원 직업에 대한 수업과정을 이수했던 ‘에셸론’이라는 이름의 ‘승무원학생분견대’는 ‘러시아학생분견대’ 산하에 있는데, 러시아학생(분견)대는 2004년 러시아 연방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러시아 최대 규모의 청년 단체다. 학생들은 이 기관을 통해 방학 때 다양한 산업, 농업, 서비스(호텔 단지, 장거리 열차, 어린이 캠프, 요양소 상담사 등) 분야에서 유급 노동을 할 수 있다.
 
2019년 여름의 알렉산드르 마트베예프 씨. 그는 이제 정식 승무원이 됐다. 사진/필자 제공
 
주목할 점은 이 조직이 1991년까지 존재했던 꼼소몰 산하 전소연방학생건설(분견)대와 2004년에 설립된 전러시아공공청년운동(러시아의 학생 및 학생협회연합)의 계승자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학생대’, ‘학생단’이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학생분견대’라는 번역이 먼저 떠오른 것은 사용되는 군사적 성격의 용어를 포함해 꼼소몰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24화, 25화 참조). 실제로 이 단체의 공식 사이트에는 ‘시민 및 애국 교육을 다루며 청년의 창의성과 스포츠 잠재력을 개발’한다는 소개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횡단열차 안에서
 
열차 안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눈에 거슬리는 장면도 보인다. 승무원들이 어린 여성이어서 그런지 말을 잘 안 듣고 치근대듯 쓸 데 없는 질문을 자꾸 하는 중년의 남자 승객이 두 명 있다. 쯧쯧. 학생-승무원들은 인내심 강하게 대꾸해 준다.
 
이번 동승객들 중 아냐 씨와 8학년인 그녀의 딸 올랴(14세) 그리고 2학년인 아들 빠샤(7세)가 있다. 모스크바 근교에 사는 이 가족은 바이칼에 휴가를 다녀오는 중이다. 이들은 슬류쟌카의 산 너머에 있는 부랴트의 산악 마을 아르샨에서 해발 2195미터의 산을 등반했다고 한다! 내가 슬류쟌카에서 만났던 폴란드 친구 아쉬까가 비 때문에 못 간 지역이다. 약간 떨어진 좌석에는 엄마 이리나 씨와 거의 두 살이 된 딸 예바가 있다. 아기가 계속 바닥에서 뒹구는데도 내버려 두는 걸 보고 아기를 방치하는 건가 싶어 안 좋은 선입견이 잠시 들었지만 얘기를 나눠 보니 그렇지가 않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다니. 쯧쯧. 자신에게 혀를 차며 육아의 수고로움을 되새긴다.
 
어린이들이 카드로 놀이를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산을 등반한 아냐 씨의 아들, 일곱 살 빠샤이다. 사진/필자 제공
 
아냐 씨와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이리나 씨로부터 샤먼 산(샤먼스키예 고릐)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 캄캄한 밤이다. 나는 배낭을 메어 손이 자유로우니 이리나 씨의 큰 짐 두 개를 들었다. 아기를 데리고 이렇게 많은 짐을 나르다니. 짐을 들어줘 고맙다고 그녀가 마중 나온 남편을 재촉해 그의 차로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준다. 고맙게도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이리나 씨의 두 살된 딸 예바.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해 잠시 동행했다. 사진/필자 제공
 
교회와 꼼소몰 동상 사이
 
예카테린부르크를 기착지로 선택한 것에 큰 이유는 없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중간 어디에 내리든 그곳만의 매력과 ‘그때 거기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예카테린부르크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지점에 있고, 표트르 1세가 아내인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따 도시를 명명했으며,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의 중간쯤 된다 싶어 쉽게 결정했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도시 외곽의 아시아-유럽 경계탑에 갈 생각도 아니었다. 풍부한 역사를 가진 도시를 짧은 시간 내에 돌아보기란 숨찬 일이다.
 
피상적으로 둘러보고 받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인상은(기차의 승객들이 이미 예고했지만) ‘부자 도시’라는 것, 그래서인지 스쳐 지나가며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뭔가 여유로워 보인다. 이곳이 중공업 도시로 유명해 철강, 야금, 군수산업과 광학, 기계 등 다양한 산업이 모여 있고, 운송과 물류의 허브인데다가, ‘우랄의 수도’라 불릴 만큼 행정적 중심지이기도 하니 부자 도시일 만하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주(예수)승천교회로 한 러시아 신자가 들어가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그러나 물론, 누구에게나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주(예수)승천교회 앞 공원에서 만난 세 아이들이 그렇다. 타지키스탄 출신인 이 남매 어린이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주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 도시로 왔다. 8남매인 이들의 맏형은 열네 살, 식품저장창고에서 일한다고 여덟 살 소년 벤자민잔이 귀띔해 준다. “아버지는 일하고 어머니는 저쪽에 앉아 있어요.” 먹고 살 길을 찾아 예카테린부르크와 타지키스탄을 오가다가 벤자민잔은 여기서 태어나 러시아 이름도 따로 갖고 있다. 부자 도시에서도 어김없이 구걸하는 어린이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서 있는 한쪽엔 정교회의 사원이 있고 다른 한쪽엔 우랄 꼼소몰 동상이 서 있다.
 
주(예수)승천교회와 우랄 꼼소몰 동상 사이에서 만난 타지키스탄 어린이들. 마샤(9세), 벤야민잔(8세), 랄라잔(4세) 남매와 그들을 매일 만나는 러시아 여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아이들과 수다 떨며 놀다가 자리를 뜨니 중년의 한 러시아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가는데 세 남매가 달려가 안긴다. ‘엄마는 아닌데... 목에 아이디카드가 걸려 있는 걸 보니 사회복지사인가?’ 그녀는 웃으면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더니 봉지에서 음식을 꺼낸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떠나는 그녀가 궁금해서 묻는 나의 질문에 답하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뇨, 사회복지사는 아니고 직장이 근처라 매일 지나다니는데 늘 여기서 아이들을 보거든요. 그래서 가까워졌지요.”
 
우랄 꼼소몰 기념 동상. 1959년 1월 10일에 제막됐다. 사진/필자 제공
 
성인의 반열에 오른 황제의 가족
 
여기서도 멀리, 도로 건너편 저쪽에 있는 ‘피의 교회’가 보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의 자리에서 물러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차르스코예 셀로와 토볼스크를 거쳐 1918년 봄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져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다. 당시 토목기사 이파티예프의 저택이었던 건물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와 그의 가족은 가택연금을 당한 후 1918년 6월 16일에서 17일로 넘어가던 밤에 처형된다. 황제의 가족 7명과 함께 하인, 주치의인 4명도 처형됐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이곳에 혁명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피의 교회’ 출입구에서 만난 한 수녀님의 설명이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1927년~1932년 때의 일이다. “그런 후 적들(반대자들)은 이곳을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정했지요. 이곳은 황무지처럼 됐어요. 하지만 소련 시절에도 사람들이 십자가를 가져와 죽은 차르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위령곡을 부르다가 경찰에 쫓겨나기도 하고요. 여러 해 동안 그런 일이 비밀스럽게 지속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놀랍게도, 차르 가족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가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순교자’로 시성(諡聖)했고, 2000년에는 러시아 내에서 긴 논쟁 끝에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그들을 ‘열렬히 견딘 자’(러시아어에서만 사용된다)로 시성한 것이다. 왜일까?
 
'피의 교회'(흐람 나 크로비) 앞에서 설명을 해 주신 수녀님이 다른 방문객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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