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식당을 살리기 위한 방송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파리 날리던 가게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 주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근심 가득하던 식당 주인의 표정이 마무리될 때쯤 환한 미소로 바뀌는 장면은 적지 않은 감동도 준다.
출연하는 식당이 가진 문제는 제각각이다. 상권에 맞지 않는 메뉴, 손님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가격, 비호감을 주는 응대, 잘못된 조리법이나 맛없는 음식, 비위생적인 매장·식자재 관리.
거듭된 실패로 만들어진 패배 의식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음식 맛을 비롯해 손님을 끌어들일 모든 준비가 됐지만 활성화되지 못한 상권 등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메뉴와 가격, 응대·관리 방식, 음식 맛 등은 솔루션을 통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개선된다. 상권 등의 문제인 경우는 전파의 힘이 해결해준다.
어려운 것은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는 일이다. 물론 더 큰 노력이 들지만 결국은 주인들은 마음을 다잡고 식당은 손님이 북적북적한 상태로 방송은 끝맺음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이 평소 즐기던 방송 프로그램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몇 년 전 헬조선이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번은 접했다. 지옥을 의미하는 '헬(hell)'과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조선'이 합쳐진 이 단어는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힘들고 희망도 찾기 어려운 현실을 비하하는 데 쓰였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이 아닌 사회 전반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헬조선이란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정반대의 인식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나온 한 조사를 보면 '한국은 희망이 없는 헬조선 사회'가 아니란 응답은 70%에 육박했다. 우리나라의 국가역량이 선진국보다 우수하거나 비슷하다는 답변도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헬조선이란 자기비하가 자부심으로 반전된 것이다.
자아도취나 정신승리로 생겨난 현상이 아니란 것은 우리나라 밖에서 증명해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세계 질서를 이끄는 리더 그룹에 합류하라는 의미로 G7 정상회의에 초청했고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나서서 우리나라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주도해나갈 힘이 있다고 평가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대응으로 평가받는 K-방역 덕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방역만 잘한다고 세계가 추켜세우고 새로운 체제의 중심이 되라고 할 리 만무하다. K-방역을 통해 관심밖에 있던 한국이란 나라를 주의 깊게 보게 됐고 거기서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우리의 기술과 민첩하고 역동적인 대응력, 높은 사회적 신뢰와 시민의식 등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카타르에서의 LNG선 수주도 코로나19 진단키트 공급이 크게 기여한 것은 맞지만 우리 조선사들이 기술과 생산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국은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달라진 위상에 만족하고 감상에만 젖어 있다면 구애는 금세 사라질 것이다. 본받거나 도움받을 만한 게 없는 상대와 손잡을 이유가 없어서다.
골목상권 살리기 방송에 출연한 가게는 모두 줄을 서는 유명한 식당이 되지만 명실상부한 '맛집'으로 남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넘치는 손님과 그에 따르는 매출에만 매달려 출연 당시의 관리·음식 수준을 유지하기는커녕 뒷걸음질 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K-방역을 통해 드러낸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는 동시에 정치와 사법, 사회구조 등에 남아 있는 구태를 하루빨리 해소하고 다듬지 않으면 '유명'이란 수식어만 남을 것이다.
전보규 기자 jbk880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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