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소식이 수천 건씩 쏟아지는 ‘뉴스의 시대’, 이제는 ‘구문(舊聞)’이 된 어제의 신문(新聞)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기록해보고자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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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지구 반대편 남미 아르헨티나엔 43년째 자식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5월 혁명을 기념하는 장소인 5월 광장은, 1977년 4월30일 이후 자식 잃은 슬픔과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와 인권을 외치는 장소로 거듭났습니다.
1930년 들어선 친나치 군부 정권 이후 반나치 정권교체와 친나치 군부쿠데타를 반복해 온 아르헨티나. 가장 악랄하고 악명 높은 군부독재시기를 일컫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1976~198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국가에 의한 테러를 자행한 시기)'의 서막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트렐류 학살'부터 '더러운 전쟁'까지...잔혹한 '반공' 탄압
영국 출신 이주민들에 의해 건설된 트렐류(Trelew)란 도시에서 당시 군부정권이 자행한 '학살 작전(nueva Operacion Masacre)'에 의해 16명의 청년이 살해되는데요. 묻힐 뻔한 당시의 비참한 상황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3명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청년 반군이 생겨나며 저항이 커지자 군부는 이듬해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고,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도 이뤄집니다.
그러나 사실 트렐류 사건으로 군부는 보다 치밀하고 잔인한 '증거 없는 학살'을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1976년 3월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아르헨티나반공연맹(Alianza Anticomunista Argentina)을 의미하는 'Triple A'라는 이름의 '죽음의 부대'를 창설합니다.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학생, 지식인, 사제, 예술가, 노동자와 노조활동가 등을 납치·살해하는 것이 Triple A의 임무였으며, 신군부(Última Dictadura Militar)는 이런 대규모 학살을 '국가재건과정(Proceso de Reorganizacion Nacional)'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언론인 로돌포 월시(Rodolfo Walsh)에 따르면 1만5000명이 실종, 1만명이 구금됐고, 4000명이 사망했으며 수만 명이 추방됐습니다. 이 고발 기록을 군부에 서한으로 보내고 대중에게도 공개한 1977년 3월24일 이후 월시 역시 실종자가 됐습니다.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집회 모습. 군부독재시기인 '더러운 전쟁' 기간 실종된 자식을 찾아 거리로 나선 어머니들의 집회는 올해로 43년째 계속되고 있다. 사진/ 외신(CUBA DEBATE) 온라인 보도 갈무리
광장에 모인 어머니들 "모든 실종자가 우리의 아이다"
역사는 이런 혼돈의 와중에 탄생했습니다. 실종자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거리로 나가 경찰서, 병원 등을 헤매며 아이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겁니다. 아버지들이 일터로 돌아간 뒤에도 어머니들이 거리를 지켰습니다.
1977년 4월30일 토요일, 5월 광장에 14명의 어머니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군부는 3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어머니들은 집회를 열었습니다. 광장을 도는 어머니들을 이상하게 여긴 외신기자들의 물음에 군부는 '정신이상자들'이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군부는 어머니들 중 일부를 납치했고 그중 누군가는 군에 끌려간 그곳에서 그토록 그리던 딸을 만났고, 다른 누군가는 실종됐습니다. 군은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들을 위협하고 교란시켰지만, 어머니들은 집회를 계속 하기로 다짐합니다.
딸을 찾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자식과 가족, 친구, 동료를 찾을 때까지. "모든 실종자가 우리의 아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면서죠. 모성의 사회화. 이때부터 어머니들의 집회는 일종의 '운동'이 됩니다.
이듬해인 1978년 아르헨티나에선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한국에서 신군부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던 당시 88올림픽이 열렸던 때와 비슷하게,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분위기 전환'을 시도합니다. 아르헨티나는 그해 우승컵도 거머쥡니다.
그러나 축구경기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군 시설 'ESMA'에선 계속해서 고문과 살인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어머니들도 장소와 시간을 변경하며 집회를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권단체로 성장한 어머니 집회,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은 '지지부진'
다음해인 1979년 아르헨티나에 미주인권위원회가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해 열린 유소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면서 축구에 가려져 있던 진짜 이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들은 트렐류 학살이 일어났던 8월22일에 맞춰 '5월 광장 어머니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5월 광장 어머니회의 활동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고, 회보 발간과 목요집회 등의 활동을 하며 인권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코로나로 집회와 행사가 어려웠던 올해는 SNS와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 등 온라인으로 국민적 추모를 갈음했습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andez) 대통령 역시 트위터 추모 메시지로 힘을 보탰습니다.
한편 1983년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이후 정부가 '실종자 기구(CONADEP)'를 만들지만 어머니들은 국가기구의 활동을 불신하며 거리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더러운 전쟁을 시작한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 등 독재군부 최고수뇌부 2명만 종신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군 지휘관들은 가벼운 형을 받거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1989년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 대통령은 종신형을 받았던 비델라를 1990년 사면합니다.
한국의 '오월 어머니회'는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다른 이름,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5.18 광주 학살 피해 유가족 및 그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 분들로 이뤄진 단체다. 사진/뉴시스
같은 모습을 한 국가테러범죄, 너무나 다른 군부독재자의 '최후'
이쯤 되면 '데자뷰'처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한국에도 5월 어머니들이 있죠. 한국의 '오월 어머니회'는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다른 이름,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5.18 광주 학살 피해 유가족 및 그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 분들입니다.
군부독재시기 국가가 자행한 테러의 모습은 아르헨티나나 한국이나 꼭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이 안 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2006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결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후 이어진 재판을 통해 2010년 그는 다시 종신형을 받고 수감됐습니다. 한국의 '비델라'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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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씨의 재판이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가운데 전 씨가 지난 3월 재판을 받기 위해 경호를 받으며 법정에 들어서며 기자 질문에 "이거 왜 이래"하며 쳐다보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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