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연구원 시절의 일이다. 논문 막바지에 동료에게 간단한 도움을 받았다.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는데 출판되기 직전 내 데이터로 교체했다. 논문의 1저자는 나였고 교신저자는 지도교수 부부였다. 실험을 도와준 동료의 성의가 고마워 그의 이름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그가 내 논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 물었고 나는 아주 간단한 실험을 해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도교수는 저자에서 이름을 빼고 사사(감사의 글)에 넣으라고 했다. 그 정도 기여를 가지고는 논문 저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논문 저자가 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첫 논문은 2005년에 출판되었다. 학위과정에 입학하고 4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 논문은 선배에게 받은 프로젝트로 내가 마무리했다. 논문 저자의 순서를 정할 때 선배는 공동저자를 요구했다. 그가 떠나고 나 혼자 4년이 넘게 매달린 일이었고 논문의 실마리를 얻은 결과를 빼면 그가 실제로 논문 데이터에 기여한 것은 없었다. 지도교수는 내 의견을 물었고 나는 그에게 공동저자를 내줬다. 그의 기여는 2저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지쳐있었다. 덕분에 2년 늦게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그 때 한번 논쟁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문의 저자를 정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20여년 학자로 살면서 이제 겨우 논문 십여편에 이름을 올렸지만 저자 기여도에 대한 교육을 따로 받아본 적은 없다. 논문 저자의 순서는 교신저자에 의해 결정된다. 논문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1저자부터 2저자로 순서가 정해지며 마지막에 이름이 적히는 교신저자가 그 논문을 책임진다. 공동연구와 협업이 일상인 자연과학 분야의 논문에는 저자의 수가 보통 서너명 이상이기 십상이다. 거대한 국제협력 논문의 저자수는 수백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저자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는 과학계에서도 골치거리다. 이름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논문의 기여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저자순서는 과학자라면 대부분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저자 순서에 따라 성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신저자의 책임은 무겁다. 공동연구가 논문으로 출판될 때 저자순서에 대한 합의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공동연구의 결과가 고급학술지에라도 실리게 되면 과학자들은 숨겨왔던 욕망을 드러내며 싸운다. 20세기 중반 과학계가 무한경쟁의 늪에 빠지게 된 이후 저자 순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학이 낭만적이던 시절에는 고민할 필요도 없던 일이 어느 순간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되어 버린 셈이다. 물론 일부 쿨한 물리학자는 저자를 알파벳 순서로 하자고 주장하지만 생물학자들은 그렇게 쿨하지 못하다. 저자 순서는 대부분의 과학자에겐 연공서열과 같다.
과학계의 무한경쟁은 다양한 방식의 평가지표를 만들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지표는 학술지의 영향력지수다. 톰슨로이터 등의 회사가 제공하는 학술지 영향력지수는 점수로 표시되고 순위로 보여지기 때문에 연구자의 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편하다. 한국처럼 관료주의가 과학기술정책을 좌우하는 곳에서영향력지수는 사랑받는 숫자다. 하지만 논문이 실린 학술지에 대한 평가가 그 논문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논문들 중 상당수가 고급학술지에 출판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 시스템 속에서 관료들은 과학자를 손쉽게 관리할 수 있다. 이런 아수라장이 지난 수십여년간 과학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황우석 사건 땐 논문 데이터조작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더니 이젠 미성년 저자 논문으로 난리다. 장관과 야당 대표의 자녀는 부모 덕에 논문의 1저자가 됐고 교육부 감사 결과 부모의 논문에 자녀 이름이 등재된 경우가 수백건 발견됐다. 국회의원 자녀의 대학입시를 전수조사하자는 여론이 들끓는다. 입학사정관제 하에서 암묵적으로 성행했던 논문 저자 시장의 민낯이 밝혀지려 한다. 이런 시기에 학문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논문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쉽게 대학입시에 악용되는 도구가 되었을까. 누군가는 학자들의 양심 부족을 원인으로 꼽지만 어쩌면 이 사태는 대학에서 학문이 몰락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고등학생도 논문을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교수가 왜 필요할까? 고민해볼 일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Woo.Jae.Kim@uottaw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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