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길목에서 불현듯, “귀뚜라미 귀뚤귀뚤 고요한 밤에 귀뚜라미 귀뚤귀뚤 노래를 한다······”는 동요가 떠올랐다. 계속 읊조려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노래를 불렀던 어린 시절로부터 먼 시간을 지나온 탓인지 노랫말이 끝까지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정서는 더 깊어져, 어른이 된 지금에는 노래 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리움이 더 커졌고 더 짙어졌다.
귀뚤귀뚤. 이 말은 귀뚜라미가 암컷을 부를 때 내는 의성어다. 그러니까 귀뚜라미 암컷이 아닌 수컷의 소리다. 한밤에 수컷 한 마리가 암컷을 부르기 위해 불과 몇 시간 동안 약 4만 번 정도의 소리를 낸다고 하니, 그야말로 애절한 사랑 노래가 아닐 수 없다. 가슴을 울린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인 귀뚜라미가 빚어내는 사랑가에 깊은 울림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소재로 한, 다음 두 시인의 귀뚜라미 노래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온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귀뚜라미」 부분) 라고 노래했던 나희덕(1966~ ) 시인은 비록 각박한 현실과 궁핍한 환경 하에 살아가고 있는 초라한 모습의 귀뚜라미지만, 그 울음에서 삶의 중요한 의미인 ‘사랑’을 자각하려는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을 찾으려는 화자의 속내가 읽힌다는 뜻이다. 이 작품이 아등바등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법 깊은 울림으로 번져오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또한 우리에게 시 「진달래꽃」으로 잘 알려진 김소월(1902~1934) 시인은 그의 또 다른 작품 「귀뚜라미」에서 우리의 삶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존재로서의 귀뚜라미를 노래한다. “산(山)바람 소리/ 찬비 듣는 소리/ 그대가 세상고락(世上苦樂) 말하는 날 밤에/ 숫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귀뚜라미」 전문)를 몇 번 곱씹어 읽어보면, 가을밤 누군가가 들려주는 힘들고 즐거웠던 세상사에 귀를 기울이는 화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곁에 있는 귀뚜라미도 그 얘기를 함께 들어주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사람, 그리고 사람이 풀어놓는 얘기들, 거기에 함께 하는 귀뚜라미와 숫막집. 이들이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숫막집은 주막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작품 속의 귀뚜라미는 비단 사랑노래뿐만 아니라, 슬픈 세상사도 함께 들어주며 인간과 동행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서로 비벼서 울음소리를 내는 곤충, 귀뚜라미. 그것은 분명 사랑을 갈구하는 울음이다. 인류는 예로부터 이 사랑의 울음소리에 계절의 외로움을 달래고, 사람과 추억을 그리워하고 살아왔다. 또한 이 하찮은 곤충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식용과 약재로서의 효용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귀뚜라미는 우리들에게는 정서적으로도 그렇고, 미래의 먹거리 개념으로도 그렇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잠깐,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눈을 돌려 보자. 시끄럽다. 많이 시끄럽다. 이념의 날개가 강하게 부딪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날개(右翼)와 왼쪽 날개(左翼)를 서로 비비며, 어느 한 쪽 날개를 꺾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 치열하다. 오로지 사랑을 외치기 위해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비벼대는 귀뚜라미의 습성과는 정반대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들이 귀뚜라미를 잡아 서로 싸움을 붙여 그 모습을 즐겼다고 하는 기록도 있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날개 싸움을 누군가는 즐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9월의 달력을 넘기고 10월을 맞았는데도 달력에서는 여전히 시원한 갈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느낌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이 계절을 떠나지 않은 탓이다. 계절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모순이, 부정의(不正義)가, 명료한 이분법적 사고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탓이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울음소리의 속살이다. 아, 언제쯤 갈등이 그칠까. 오늘 밤에도 귀뚜라미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며 살자, 사랑하며 살자, 그렇게 간절한 호소를 할 것이 분명한데.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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