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레이캬비크·하노이의 진정한 가치
2019-06-28 06:00:00 2019-06-28 06:00:00
최한영 정치부 기자
살다보면 사람이든, 사건이든 시간이 지나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는 경우가 있다. 1986년 10월 11~12일,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만났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군비통제 문제를 솔직하게 논의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성사된 미소 정상회담은 결국 합의문 채택 없이 끝났다. 미국이 추진 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을 놓고 양측이 큰 입장 차이를 보인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기대만큼 실망도 컸다. 양측은 서로를 원망했으며 회담 이후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기사들이 나왔다. 그러나 얼마 후 레이캬비크 회담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양 정상은 이듬해 워싱턴에서 만나 사정거리 1000km 이상의 모든 미사일을 폐기하는 내용의 '중거리핵미사일협정'에 서명했으며 이는 1991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 기반이 됐다. 레이캬비크에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수준을 알았기에, 미소 양국은 워싱턴에서 어디까지 합의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위 내용은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학자로 있던 지난 2016년 7월 펴낸 책 '협상의 전략'의 한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김 장관은 종종 레이캬비크를 거론한다. 그는 지난 19일 한반도국제평화포럼 기조연설에서도 "33년 전 합의 없이 끝난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이듬해 미소 간 중거리핵미사일협정 체결의 밑거름이 되었고 냉전 해체를 위한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문득 '노딜'로 끝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떠오른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현재 기준으로는 실패한 회담이다. 합의문 작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영변 플러스 알파'를 주장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미 정상이 7시간 동안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상호 견해차이를 확실히 안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 회담에서 진전된 내용을 합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한 연설 내용처럼 '70년을 헤어져 살았던' 남북이 불과 몇 번의 회담으로 입장차이를 좁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 대통령은 26일 세계 6대통신사 서면인터뷰에서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는 한두 번의 회담으로 성패를 가늠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향후 남북·북미 간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훗날 하노이가 레이캬비크처럼 한반도 냉전종식의 전환점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당장의 장밋빛 전망에 취하지 않고 냉정한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협상에 임하길 바란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의 지적대로 "근거없는 자기충족적 예언은 실현가능한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미소 양국은 레이캬비크 회담 결렬 후 논의사항을 차분히 재검토하고 후속 논의를 준비하는데 몇 달의 시간을 쏟았다. 하노이 회담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우리 정부도 이 작업을 했거나, 하고 있을 줄로 믿는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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