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가면 2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1970년대에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완행열차를 타고 하루는 꼬박 걸렸던 것 같다. 어떻게 10시간이나 기차를 탈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엄두도 나지 않지만, 삶은 달걀과 사이다, 그리고 야채 듬뿍 넣은 김밥으로 배를 채워가며 견뎌내다 보면 종착역에서반겨주는 지인의 환한 선물 보따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버팀목이었다.
지난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의 북미 정상 회담을 위해, 왕복 이동시간만 꼬박 137시간(평양에서 베트남 당동까지 66시간 + 당동에서 하노이까지 2시간 30분, 왕복), 총 6일을 쏟아 부은 김정은 위원장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 지루하고 불편한 여정을 견뎌내기만 하면 경제발전의 비단길이 펼쳐지고, 외자 유치가 가능해지며 인민들도 잘 살 수 있다. 영변 핵시설 폐쇄를 내주고 경제제재 일부 완화를 요구하면, 북한식 경제발전의 초석이 만들어질 것이고, 궁극적으로 북한이 바라는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해진다. 내 자식과 가족들이 핵을 짊어지고 살길 바라지 않는다는 말까지 흘렸으니 진정성을 인정받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원하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머릿속을 맴도는 자신만의 고차방정식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그는 기꺼이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먹었을 것이다. 그 힘들고 초라한 66시간의 기차 여행도 전혀 구차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이 성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하지만, 변수는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상 회담을 하던 와중에 벌어진 ‘워싱턴 쿠데타’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하노이가 아닌 워싱턴 청문회에 온통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2년간 자신의 개인 변호사로 일하며 모든 약점을 알고 있던 코언은 회담이 진행되던 그 시간에 트럼프를 인종 차별 주의자이자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라고 폭로했고 ‘성폭행 추문’을 덮기 위해 상대방을 매수한 파렴치한으로 몰았다. 급기야 대선 당시 클린턴 후보의 이메일 해킹 폭로 사실을 미리 알았으며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려고 의료기록까지 조작했다고 쐐기를 박았다. 이어 CNN에서는 트럼프의 금고지기가 조만간 청문회에서 ‘2차 폭탄’을 투하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영구적이고 완전한 핵 폐기’라는 김정은의 백기 투항 공물이 나오지 않는 한, ‘하노이보다는 워싱턴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제2차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고, 김정은이 무엇을 타고 하노이로 갈 것이냐를 두고 언론이 왈가왈부할 때만 해도 이번 회담은 희망적이었다. ‘완전한 핵폐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난번 ‘싱가폴 회담’보다 조금이라도 구체적이고 진전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기에, 실패할 수 없다는 견해가 중론이었다. ‘빅딜이냐 스몰딜이냐’를 가지고 다투기는 했어도 그 누구도 ‘노딜’을 얘기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당초 그들이 만들었던 방정식은 ‘노딜’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회담 결렬 이후 “‘그들의 부분 완화 요구는 우리 입장에서는 전면 해제’이기에 ‘영변 핵시설 폐기 + 알파’가 필요했고, 결국 ‘협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트럼프 주장은 공허했다. 북미정상회담 성공으로 재선 발판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워싱턴 쿠데타‘로 위기를 맞자 반전을 위한 제물로 ’북한의 전면백기 투항‘이 필요했음을 자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가 요구한 ‘전면 백기 투항’은 김정은으로서는 북한 주민들의 생존에 대한 절박함으로 어떤 굴욕을 참고 견뎠다 해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이런 관계가 바로 이번 ‘하노이 고차 방정식’을 망가뜨리게 된 원인이 됐다.
"거짓 청문회가 엄청나게 중요한 정상회담 와중에 진행됐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듯이 왜 하필 청문회가 하노이 정상 회담 직전에 열리고 왜 하필 그때 코언이 트럼프를 껴안고 자폭하는 발언을 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사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아닌 코언의 청문회 증언을 일제히 생중계로 방송하였고 1면과 홈페이지 톱뉴스도 일제히 코언의 증언으로 도배를 했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 결렬로 인해 앞에서 웃는 자는 일본 아베 수상이고, 뒤에서 웃는 자는 대한민국의 자한당이 아닐까 싶다. 숨어서 우는 자는 김정은 위원장이고, 뒤돌아서 우는 자는 민주당과 문대통령일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떤 표정일까? 아마도 그는 ‘내 코가 석자’라며 워싱턴을 향해 달리느라 아무 생각이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