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30일 현대엔지니어링 재경본부장 김영태 전무가 갑작스럽게 보직 해임됐다. 30년간 현대차그룹에서 근무하면서 재무통으로 손꼽히던 김 전무가 현대차에서 현대엔지니어링으로 자리를 옮긴 지 불과 6개월 만에 일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가 현대엔지니어링으로 자리를 옮길 때만 해도 외부에서는 이례적인 인사 이동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교체는 충격이었고,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이에 대해 현대엔지니어링 측은 "김 전무가 기본적으로 건설 회계지식이 부족한 데다 소통도 되지 않는 등 조직과의 융화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뒷말이 무성했지만, 사건의 전말은 명쾌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랬던 그가 다시 돌아온다. 그의 따르면, 현대차그룹에서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비리를 책으로 펴고 세상을 마주할 계획이다. 문제 제기를 외부로 넓히는 내부고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정 부분 후폭풍도 불가피해졌다.
새로운 삶 준비 ”기업 분식회계 감시자 되겠다”
취재팀은 지난 5일 서울 강남역 인근 사무실에서 현재 현대엔지니어링 자문역으로 있는 김 전무를 만나 근황을 물었다. 김 전무는 현대차그룹이 퇴직 임원에 대한 예우를 위해 제공하는 계열사 자문역과 함께 분식회계 추방연대 대표도 겸하고 있다.
사진/현대엔지니어링
지난해 11월 출범한 분식회계 추방연대는 출범과 동시에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를 입증할 자료를 준비해 금융감독원에 신고하는 등 즉각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또 코스닥에 상장된 한 업체의 분식회계 혐의를 조사·신고해 감리 결과에 따라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다.
분식회계 추방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속파닷컴’이다. 속파는 'SOLIDARITY ON GETTING RID OF FRAUDURENT ACCOUNTING'의 초성을 따 만든 한글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반드시 그 속을 파악해야 숨겨져 있던 실체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 전무는 지난해 7월 현대엔지니어링과의 합의 끝에 8월10일부터 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는 속담처럼 그들(현대엔지니어링)의 행동이 갑자기 변했다”면서 특히 “(컴퓨터 해킹 등 정보통신법 위반에 대해)여러 차례 경고를 줬지만,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급기야는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지르고도 이를 지적하자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는 파렴치함을 보고 더 이상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현대엔지니어링은 실사 검증을 하자고 했으나 당일 김 전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계획도 검증도 진행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80일간의 기록, 무슨 내용 담겼나
그러면서 김 전무는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180일간 현대엔지니어링에서 겪은 일들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이르면 3월 출간을 목표로 집필에 매진하고 있다.
앞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2000년 1월 '삼성을 생각한다'를 펴내며 충격을 던졌다.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미래전략실) 법무팀장 출신인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재벌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삼성 비자금 등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 이 책은 당시 시장권력을 상징하던 삼성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었다.
이도 잠시, 김 변호사는 '배신자'의 꼬리표가 붙여진 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변한 것도 없었다. 그것이 절망을 낳게 했다. 김 전무 역시 책이 출간되면 명예훼손 등 법적 이의 제기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고난의 길일 수도 있다'는 기자 지적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김영태 현대엔지니어링 자문
그가 취재팀에 건넨 1월14일자 초고에는 '분식인지 혼식인지 나는 모르겠고, 하여튼 전무님 사표 써야겠습니다'는 책 제목(가제)과 함께 '건설 180일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책은 '1부 현대차에서 건설회사로', '2부 건설에서 180일 부실현장'으로 시작해 '11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며'로 마무리됐다.
세부적으로는 "현대엔지니어링으로 가야겠습니다"는 그룹 인사조치 배경 설명과 함께 '와서 보니 부실은 허다 관리는 허당', '수시로 터지는 건설현장 문제들' 등이 실렸다. 또 책 중간중간에는 '상봉동 상가 미분양' 건과 '진주 초장지구 엠코타운 미분양' 건 등 부실사업 및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구체적 내용과 날짜들이 꼼꼼하게 기록됐다.
김 전무는 "회사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고, 문제 제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책을 준비하게 됐다"며 "내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모두 담았다"고 말했다.
“대기업 분식회계 근절, 현재 외감법으로는 한계”
그는 현행 '주식회사 외부감사법(이하 외감법)'으로는 근본적인 분식회계를 근절할 수 없다는 점과 함께 실질적으로 강화된 법 개정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 전무는 “외감법은 회계감사자 또는 법인이 적정하게 감사하면 모든 분식회계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는 것처럼 잘못된 전제를 하고 만든 법률”이라면서 “회계법인 선정을 기업이 임의로 알아서 선정하는 ‘자유계약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부터 문제”라고 주장했다.
회계법인이 기업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종속적 구조이기 때문에 분식회계 등 불법에 대해 투명하게 감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령, 특정 항목의 비용이 갑자기 급증했을 경우 내용 확인을 위해 자료를 회사 측에 요구하지만, 기업들은 여러 핑계로 자료제출을 지연하거나 제출하지 않으면 회계법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구조다.
그는 또 “회계법인은 한정의견이나 의견거절을 함부로 줄 수도 없다”면서 “거래소 종목의 경우 한정의견이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의견거절이면 상장폐지가 된다. 더구나 코스닥 종목의 경우, 한정이나 의견거절이면 바로 상장폐지가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현실에서는 99%가 적정의견을 낼 수밖에 없다"고 규정했다.
때문에 그는 “분식회계 방지법을 만들면 해결된다”면서 “자유계약제가 아니 감사지정제를 실시하고, 부실한 회계감사 결과에 대해서는 해당 회계사에 대해 자격정지 기간을 5년에서 10년 정도 부과하는 것을 분식회계 방지법에 담는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전무는 “내부 폭로를 통해 피해를 본 분들을 모아 함께 사회 전반의 문제점들을 감시함으로써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면서 “앞으로 올바른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죄인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택 기자 ykim9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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