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돌을 맞는 한글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한글’은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이다. 그러나 인터넷시대를 지나 스마트폰시대로 넘어오면서 한글 파괴 현상은 극심한 수준이다.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오가는 은어, 신조어, 줄임말, 비속어의 범람은 세대간 소통 단절이라는 사회적 문제까지 양산하고 있다.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지난해 1월부터 올 4월까지 청소년들이 주로 이용하는 웹사이트에 올라온 게시 글을 분석한 ‘청소년의 언어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 심각성이 잘 나타나있다. 청소년들이 자주 가는 웹사이트와 SNS, 커뮤니티 등 온라인 게시글 81만9997건을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청소년이 온라인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표현의 32.3%가 욕설, 상처, 펌하 비속어나 은어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어학자나 청소년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비속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재미’인 경우가 많다. 2014년 국립국어원 용역 보고서 ‘청소년의 건전한 대화 문화 확립을 위한 지도 자료 개발’(연구 민병곤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외 6명)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부정적인 대상이나 상황을 비속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좀 더 강조하거나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보다 더 강렬하게 표출하고자 하는 청소년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조사결과 욕설 등 비속어 대상으로는 절반가량이 친구 사이였으나, 불특정 일반여성(여성 혐오)나 불특정 일반남성도 많았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과 관련해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미삼아 비하하는 대상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한글 파괴 현상으로 이어지는 청소년들의 비속어 등 사용은 재미와 함께 공격성을 수반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청소년들이 인터넷이나 SNS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은어인 ‘노잼’, ‘솔까’, ‘낫닝겐’, ‘열폭’, ‘극혐’ 등의 단어도 “너는 어떻다”는 식의 단정적 표현, 비하하고 조롱하는 표현, 저주하는 표현, 차별하는 표현이 녹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어학자나 청소년심리학자 등 전문가들에 따르면, 공격적 언어 표현은 상대 개인의 자아개념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부모나 교사,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민 교수 등은 앞의 보고서에서 “공격적 언어 표현 방식으로 개인의 자아 개념이 부정적으로 형성되면 의사소통 방식 또한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고 지적했다. 또 “청소년 의사소통 문화의 이러한 부정적 인 양상이 만연하게 되면 공동체의 의사소통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우려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여러 진단과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박찬규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 사무총장은 “욕설, 은어, 외래어가 아닌 긍정적이고 밝은 언어 사용을 장려하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청소년들의 관심사가 높은 주제를 IT기기를 활용해 교육, 잘못된 언어 사용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청소년기가 완전한 인격 성숙기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부모나 교사 등 어른들의 언어습관부터 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철상 호서대 청소년문화상담학과 교수는 “청소년들이 자아의식과 분석능력을 갖고 청소년만의 밝고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해결책”이라며 “다양한 그들만의 언어문화를 인정하고 교사나 학부모, 청소년지도사등 사회지지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혜원 밝은청소년 부장은 “청소년 언어문화 개선은 또래문화부터 시작할 때 더욱 효과적인만큼 학급단위의 지속적인 인성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며 “청소년들의 언어폭력 현상은 그들을 병들게 한 어른들에게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에게 정작 제공되어야 인성교육은 어른들을 위한 정책에 밀려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며 “교사와 부모 집단이 먼저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고 올바른 언어 사용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분별한 언어가 난무하는 TV 등 대중매체에 대한 규제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박 사무총장은 “하드코어 힙합가수들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노랫말은 음률과 율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중독성도 강하며 빠르게 전파된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청소년 보호를 위한 올바른 언어 사용 강화 조치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도 “청소년들이 표준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교육한 후 은어와 속어의 사용을 지도해야 한다”며 “청소년 언어 지도는 대중매체 언어 사용 규제 강화와 발맞춰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의 바르고 고운말 사용을 위한 올바른 교육방법은 초등학교 때부터 실시해야 한다는 데 이론이 없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욕설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욕설은 대표적인 비속어로 공격성이나 비하나 모멸감을 포함하고 있다.
최근 교육부에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10명 중 9명은 욕설을 쓰고 그중 7명은 뜻도 모르고 욕설을 쓰는 것으로 집계됐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도 비슷한 수준이다. 그냥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최근 펴낸 ‘청소년과 부모님을 위한 언어 순화 길잡이’에 따르면, 욕설이 어떤 어원인지, 왜 나쁜 말인지 ‘정확하고 충분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 가정에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녀는 부모에게 존댓말을 쓰고, 부부간이나 형제간에는 존중하는 단어를 가르치는 것이 바르고 고운말을 교육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 초등학생을 포함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런 아이들은 가상공간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가상공간에서 쓰던 어휘를 현실 공간으로 끌고 올 때가 적지 않다. 이런 때는 부모든 교사든 그때마다 단호하게 지적해야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전문가들은 또 초등학생 때부터 TV나 인터넷에 과도하게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유해 언에 사용에 둔감해지고 있다며 자녀들이 즐기는 게임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연령에 맞는지를 확인하고 일주일 단위로 자녀가 게임하는 시간을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모나 교사가 해야 할 것은 일방적인 단속이나 교육만이 아니다. 언어는 상대성이 강한 만큼 스스로 조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선 자녀들의 자존감을 건드리거나 열등감을 부추기는 말은 피해야 한다.
특히 “OOO집 애들은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식의 말은 열등감과 자존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말이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라는 식의 비꼬는 말도 위험하다. 잘못을 직접 지적하는 말 보다 자존심을 더욱 훼손하기 때문이다.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