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사회적 비리에도 '고전은 영원하다'는 말이 통한다.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작금의 상황들을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돈 있으면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을 경우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최근 대법원이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건을 파기환송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이 회장은 1657억원의 횡령과 배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2심에선 징역 3년을 받았다. 하지만 상고심은 탈세와 횡령 혐의는 원심 판결을 인정하지만, 배임 혐의는 법 적용이 잘못됐다며 파기환송했다.
이 회장에 대한 사법당국의 처분은 흡사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김 회장은 수천억원대 자금을 위장 계열사에 지원한 혐의로 1, 2심에서 이재현 회장과 같은 4년,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갔지만 대법은 일부 유죄혐의를 파기했다. 이후 김 회장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향후 이재현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 1990년 이후 국내 10대 재벌총수 중 7명이 총 2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형이 확정된 후 평균 9개월 만에 사면을 받고 현직에 복귀했다. 총수들이 경제 부흥과 고용에 일조하기 때문에 수천억 정도의 횡령·배임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지난 2012년 경제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여야 후보 모두 사법당국의 재벌 총수 봐주기 판결을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하며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일환으로 사법당국도 총수 및 기업인에 대한 칼을 빼들었다. 소환이 줄줄이 이뤄지자 재계를 담당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내가 법조에 출입하는지, 재계에 출입하는지 헷갈린다'는 자조섞인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재벌총수에게 내려지던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양형 룰이 깨지는 듯 했다. 하지만 3년 여가 지난 지금, 이 같은 룰이 다시 부활하는 조짐이다.
김승연 회장과 구자원 LIG 회장이 그렇다. 나란히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현재 국회 법사위에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일부 개정 법률안이 3년째 계류 중이다. 집행유예 선고 남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재계의 반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재벌총수가 실형 선고를 받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이들은 평소 멀쩡했다가도 구속이 됐다하면 휠체어나 앰뷸런스에 실려 검찰이나 법원에 등장한다. 국민들은 총수들의 이 같은 모습을 수십년째 봐왔다.
2년 넘게 수감생활을 한 건 최태원 SK회장이 유일하다. 최 회장은 2008년 SK 계열사 자금 450억원을 사적 이득을 위해 횡령했다는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지난 광복절 때 2년 7개월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특별 사면됐다.
사면을 위해 SK그룹 내부적으로 백방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최 회장의 특별사면과 회장으로의 복권 이유는 경제 활성화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걸었던 '대기업 지배주주,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를 제한하겠다'는 대선공약이 무색하다.
법정에서 '왜 횡령·배임을 저질렀느냐'는 질문을 받은 기업인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답한다.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를 위한 결정이었노라고. 실제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감수해야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재벌총수들의 범죄를 정당화하기엔 영 마뜩치 않다. 재벌총수에 대한 사법당국의 자비는 더더욱 용인되지 않는다.
경제계에서는 최근 거세지고 있는 반(反) 재벌 정서를 우려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전경련이 '우리 경제위기 현황과 재벌의 오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며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쉽사리 수긍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대를 이어가며 경제력을 견고히 해 왔다. 이런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은 입법하는 대신 불리한 법안은 막아왔다. 또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실형 대신 집행유예로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국민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도 적어지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낙수효과를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구조 속에서 양극화는 더 심해질 뿐이다.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경영활동을 하는 재벌총수들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죄를 인정하며 사법당국의 처벌을 기꺼이 받는 사례를 볼 수 있을까.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은 재벌 스스로가 만들었다.
임애신 기자 vamo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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