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기업경영 목표는 결국 돈(이윤추구)이다. 장기적인 불황과 그에 따른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기업들이 최근 너나 할 것 없이 '비상경영' 선언과 함께 재무전문가를 경영 최일선에 배치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경영권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 등 그룹의 최대 현안이 닥칠 때마다 각 그룹사들은 앞다퉈 재무통과 기획통을 수장 자리로 끌어올려 변화와 안정을 도모했다. 이는 마치 공식처럼 여겨져 삼성이나 현대차 등 3세로의 경영권 승계 직전에 처한 그룹들의 인사를 가늠케 했다.
그간 주로 품질이나 기술, 생산, 영업 부문에서 주력 계열사의 CEO를 맡아왔던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 6월 현대제철의 강학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시작으로 7월에는 기아차의 박한우 CFO를, 8월에는 현대차 이원희 CFO를 각각 사장으로 승진발령했다. 하나같이 모두 재무통들이다.
SK그룹도 지난해 사장단 인사에서 재무통인 조대식 사장과 CFO 출신의 유정준 사장을 각각 경영 전면에 내세웠고, SK네트웍스도 SK글로벌 시절 재무담당 전무까지 지냈던 문덕규 SK E&S 사장을 이창규 사장 후임에 앉혔다.
LG그룹도 CFO 출신들을 경영 전면에 내세우며 안정을 찾고 있는 그룹사들 중 하나다. LG화학이 지난 2009년 조석제 CFO를 사장으로 승진시켜 위기관리를 시작했고, 올해는 CFO였던 정도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런데 15일 현대중공업이 단행한 사장단 인사는 이러한 흐름과는 상반된다. 재무통(通) 출신이 물러나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팔방미인형이나 종전의 기술통, 투자통들이 속속 복귀하는 모습이다.
(사진=현대중공업)
현대중공업은 이날 인사에서 지난 2010년 10월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로 이동했던 권오갑 사장(사진)을 4년여만에 다시 불러들였다. 현대중공업 기획실을 '그룹기획실'로 확대개편한 후 그 총책을 맡겼다.
권 사장은 현대중공업 재직 시절 경영지원부터 영업, 홍보 등을 총괄하면서 다양한 노하우를 익힌 전형적인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다. 인맥 또한 안팎으로 광범위하다.
현대오일뱅크 사장을 지낸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정유업계 영업이익률 1위를 지켰고, 올 상반기 업계 전체의 실적부진 속에서도 1400억원이 넘는 흑자를 달성하는 능력을 보였다.
상반기에만 창사 이래 최대인 1조300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고 20년 만에 파업위기에 봉착한 현대중공업에 변화를 가져올 적임자로 꼽힌 것.
아직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개편 신설된 그룹기획실은 다른 대기업들의 기획조정실과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될 전망이다. 팔방미인인 권 사장의 복귀는 현대중공업이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그룹화에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평가다.
현대중공업은 또 같은 날 이재성 회장이 사임하고 김외현 단독대표이사 체제로 바뀌었음을 공시했다.
이재성 전 회장은 대부분의 경력을 기획과 재무분야에서 보낸 재무통으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규 발주 급감과 선가 하락, 중국 등 신흥국의 추격 등으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현대중공업이 내실경영을 위해 선택한 카드였다.
비용절감과 선별수주 등 철저히 안정적인 경영을 추구했던 이 전 회장 체제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과도한 안정 지향이 저가수주와 그에 따른 사상 초유의 영업실적 부진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김외현 단독대표이사 체제 전환은 사실상 이재성 회장의 경질인 것이다.
앞서 지난달 12일 현대중공업이 최길선 전 사장을 조선·해양·플랜트사업 부문 회장으로 복귀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인사다. 최 회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시절부터 조선사업 현장에서 설계와 생산, 기획 등을 수행했던 40년 경력의 기술통이다.
재무적 관점에서 통합적 관점으로 시각을 전환한 현대중공업 앞에는 실적 부진과 임단협 진통 외에도 삼성엔지니어링과의 합병으로 몸집을 키운 삼성중공업의 견제, 중국업체들의 추격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구원투수들의 어깨에 벌써부터 무거운 짐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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