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현우기자] 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이 민선5기 동대문구청장 선거에 도전하는 심정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1998년 40대 젊은 나이에 민선 2기 동대문구청장에 당선됐지만,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 민선3기 선거에서 홍사립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후보에게 3066표차이로 분패한 것이다. 그러나 홍 전 구청장은 재선까지 성공했지만 뇌물수수혐의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유 구청장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서 약 30년을 동대문구에 살았다. 그는 구청장 선거에 다시 도전했을 때 동대문구, 그리고 구민들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결심을 굳혔다고 회상했다. 그의 각오가 통했을까? 이후 유 구청장은 민선5기, 민선6기 연달아 당선됐다.
◇14일 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이 구청장실에서 구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뉴스토마토)
유 구청장은 젊었을 때부터 정치,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신문배달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재수까지 실패하며 대학을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3수끝에 부산 동아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군사독재 정치의 연장으로 국민의 자유가 통제되고 표현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민주화가 돼야 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학 때 행정고시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시대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는 1979년 부마항쟁에 참여하는 등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졸업 이후에도 유 구청장은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85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선전부장에 임명됐다. 이 때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94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조직 국장을 맡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1995년 답십리지역에서 제4대 서울시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지방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유 구청장은 자서전에서 "당시 서울시 의원은 명예직으로 월급이 없었지만 원내대표와 운영위원장을 겸직해 격무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유 구청장은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갈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에서 국회의원, 시의원은 임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해 무산됐다.
청와대는 가지 못했지만 유 구청장은 민선2기 동대문구청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40대로 젊은 나이였지만 더 큰 정치를 위해서는 행정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가 구청장을 맡으면서 동대문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9년 반부패체감도 최우수구, 2000년 한국청년연합회 공무원친절도 최우수구, 2001년 시민만족도 최우수구로 내리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지방정치에 대한 도전은 한 때 좌절되기도 했다.
이후 유 구청장은 과거의 인연으로 민주당 사무부총장, 부대변인 등의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정치적인 낭인'이라고 평가하고 동대문구에 머무르며 재기를 노렸다.
와신상담 끝에 유 구청장은 구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결국 민선 5기 동대문구청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제 민선 6기를 시작하는 중이다. 유 구청장은 구정 운영의 핵심 가치를 '사람중심의 행복한 동대문구'로 정했다. 주민들의 눈높이에서 주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3기 연임의 대장정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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