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유로존 '경기침체(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4년여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데다 민간대출마저 위축돼 ECB가 부양책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유로화 강세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점도 경기 부양책 도입설에 힘을 실어준다.
다만, 유로존 경제가 살아나는 추세라 별도의 추가 부양책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물가상승률 4년來 최저..경기침체 우려 '부각'
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는 3일로 예정된 ECB의 정례 통화정책회의를 앞두고 경기 부양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고 보도했다.
지난 3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이 전년대비 0.5% 상승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009년 11월 이후 최저치다. ECB 목표치인 2%와도 엄청나게 동떨어진 수치다.
유로존의 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0월부터 6개월 연속으로 1%대를 밑돌고 있다. 디플레 우려가 처음으로 불거진 지난 10월에는 0.7%를 기록했다. 이후 11월에는 0.9%로 소폭 오르더니 12월에 다시 0.8%로 내려갔다. 올해 1, 2월엔 0.8, 0.7%를 각각 기록했다.
◇유로존 2012~2014년 3월 물가상승률 추이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문제는 물가 하락이 지속되면 소비심리가 심각하게 위축돼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물가가 추가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소비를 멈추거나 뒤로 미룬다.
올리 렌 EU 경제담당 집행위원은 "저물가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면 유로존 내 경제 불균형을 고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출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경기침체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은행의 유동성이 시중에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민간소비와 기업투자가 정체됐다는 말이다.
ECB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2월 은행들의 가계 및 기업을 상대로 한 민간 대출은 전년 동기보다 2.2% 감소했다. 지난 1월에는 2.3% 감소했으니 2개월 연속으로 대출이 줄어든 것이다.
유로화 강세도 ECB의 책임론에 무게를 싣는다. 시중에 자금을 풀어 유로화 강세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6개월간 미 달러 대비 유로화는 2% 상승했다. 유로화 강세는 수입 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있으나, 수출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해외로 수출하는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수출이 늘어야 유로존 경제가 회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로화 강세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악재다.
◇기준금리 0.25% → 0.15%..추가 부양책 요구 '증가'
이처럼 물가지표와 대출동향이 경기침체 위기감에 불을 지피자 유로존 안팎에서 경기부양책을 서둘러 단행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우선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루이스 마리아 린데 스페인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유로존의 기준금리를 추가로 낮출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스페인의 지난 3월 CPI는 전년 동기보다 0.2% 하락했다. 스페인 CPI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이날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사진)도 "저물가는 유로존의 성장과 고용 회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ECB에 추가 통화 완화를 주문했다.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ECB가 이번 통화정책 회의에서 추가 부양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견했다.
기준금리 인하, 마이너스 예금금리, 저금리장기대출프로그램(LTRO), 미국식 양적완화 등의 부양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올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외환전문 투자사이트인 액션포렉스는 이날 보고서를 내고 유로존의 기준 금리가 현행 0.25%에서 1.0%포인트 내려간 0.15%포인트로 하향 조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액션포렉스는 저금리장기대출(LTRO)이 추가 도입될 수 있다고 점쳤다. 이 방식을 통해 막대한 유동성을 시장에 풀어놓을 수 있다.
LTRO는 이미 2차까지 시행 중인데, 1차 LTRO의 만기 시한이 내년까지라 이번에 3차를 단행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현재 덴마크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이너스 예금금리 또한 대출을 촉진할 수 있어 ECB 내에서 관심 있게 다뤄지고 있다.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식이 아닌 직접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채권을 매입하는 미국식 양적완화가 단행될 가능성도 있다. 경기부양에 회의적이던 독일 중앙은행까지 양적완화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25일 옌스 바이트만 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와 같이 양적완화를 도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유로존 경제 회복 중..ECB, 포문 열지 않을 것
반대로 부양책이 불필요하다는 측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물가가 계절적인 요인으로 잠시 하락했을 뿐 곧 오를 것이며 경제가 살아나고 있어 경기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
부활절이 늦어진 것과 함께 온화한 겨울 날씨가 이어져 에너지와 식료품 가격이 내려간 것이지 소비심리 자체가 위축되지는 않았다는 분석이다.
코메르츠뱅크는 이러한 변수가 사라진 이달부터는 물가가 다시 오를 것이라고 내다보며 4월 CPI 상승률 예상치를 0.9%로 잡았다.
이 논리대로 하면 ECB가 서둘러 부양책을 단행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물가지표를 제외한 주요 거시경제 지표들은 호전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3월 유로존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3을 기록했다. 유로존은 경기확장을 뜻하는 50선을 9개월째 웃돌고 있다.
고용시장도 개선됐다. 지난 2월 유로존의 실업자 수는 전월보다 3만5000명 줄었다.
카스텐 브제스키 ING그룹 이코노미스트는 "거시경제 지표는 단순히 개선된 것이 아니라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며 "유로존 경제는 ECB가 예상한 그대로 호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CB는 올해 유로존이 1.2% 성장하고 오는 2015년에는 1.8% 도약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기침체 불안감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의견에 힘입어 이번에도 정책 변경은 없을 것이란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달 31일 로이터폴에 소속된 유로 마켓 트레이더 22명 중 18명은 오는 3일에 열리는 ECB 회의에서 금리가 동결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지난주에도 로이터폴 전문가 72명 중 70명은 이번 회의에서 변경사항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들 전문가들은 앞으로 발표될 4월 CPI 지수, 고용지표, 소매판매 등이 악화되는 등 경기침체 조짐이 확실할 경우에만 ECB가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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