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부호들)⑫장인 주룽제지 회장, '폐지의 기적' 이루다
자수성가형 女갑부..2006년 中 여성 부자 순위 1위 등극
홍콩·미국서 폐지 수집해 재가공..제지 분야에만 주력
2014-03-31 10:00:00 2014-03-31 10:00:00
◇장인 주룽제지 회장(사진=바이두백과)
 
[뉴스토마토 조윤경기자] 1980년대 일본 NHK의 연속 TV소설 '오싱'이라고 아시나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릴때부터 더부살이하던 한 소녀, 오싱이 온갖 역경을 딛고 일본 굴지의 기업가로 우뚝 서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경제 성장기를 배경으로 그려낸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62%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일본뿐 아니라 한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방송 시간대에 인적이 끊기고 범죄율이 떨어질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는데요.
 
굴곡 많은 7전 8기 스토리로 감동을 선사했던 이 오싱을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언급한 중국의 여성 기업가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 주룽제지(玖龍造紙) 창업주인 장인(張茵) 회장입니다.
 
실제로 장인은 문화혁명 당시 반동분자로 몰린 아버지의 옥살이로 일찍부터 8남매의 장녀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는데요. 이 때문에 그는 "그간 베짜기, 경리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며 "오싱처럼 작은 상점에서 시작해 회사 규모를 점차 늘려 나갔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중국판 '포브스'인 후룬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장인과 그의 가족은 작년 9월 기준으로 270억위안의 자산을 보유해 중국 갑부 순위 24위에 올라 있는데요. 2009년 한때는 중국 대부분의 남성 갑부를 제치고 중국 부자 서열 2위에 등극했고, 2006년에 여성 부자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고 자수성가형 여성 갑부로 꼽히는 장인은 미개척 광산에서 금맥을 찾아가 듯 황무지 같았던 폐지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85년 당시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종이 값이 급등하던 홍콩으로 건너가 단돈 3만위안으로 폐지 재활용 산업에서 부를 일군 것이죠.
 
"창업 과정에서 신용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믿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처럼 장인은 '신뢰'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폐지 회수 종사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사업을 확장시켰는데요. 이후 입소문이 퍼져 그는 '폐지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게 됐습니다.
 
폐지에 대한 그의 열정은 홍콩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큰 땅으로 가야 더 풍부한 폐지 자원을 발견할 수 있다'며 남편과 함께 미국행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198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폐지 수출 회사인 중난(中南)홀딩스를 설립한 후, 이를 5년도 채 안돼 현지 업계 1위 회사로 바꿔놨기 때문입니다.
 
장인은 당시 수출품이 든 중국 컨테이너들이 미국에서 화물을 인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빈 배로 돌아간다는 점을 활용했습니다. 현지에서 수집한 폐지를 빈 컨테이너에 실어 물류비를 절감한 후, 중국에 세운 재활용 공장에서 낮은 원가에 고급 종이상자 등을 재생산한 것이죠.
 
이로 인해 그는 회사 설립 10년 만에 미국에서 7개의 폐지포장공장과 운송업체를 운영하게 됐는데요. 중난홀딩스는 아직까지도 연간 수출 규모가 500만t을 넘어서는 미국·유럽의 가장 큰 종이 공급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장인은 1995년 중국 광둥성 둥관시에 1억1000만달러의 초기 자금을 들여 제지 공장을 세운 후 주룽제지를 설립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폐지 활용의 여왕'에서 '제지의 여왕'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골판지를 주요 생산품목으로 다루는 주룽제지는 둥관뿐 아니라 톈진, 충칭, 천저우대만상인투자구 등 중국 내 5개의 생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데요. 매년 설비를 추가할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일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게다가 2006년에는 홍콩 증시 상장에 성공한 이후 주가가 고속으로 오르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장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업이 단기간에 번창한 비결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은 자세'를 꼽았습니다. 사업을 여기저기 벌리지 않고 줄곧 한 우물만 팠다는 것입니다.
 
그는 "80년대를 기점으로 모두가 중국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왔지만, 나는 홍콩에서부터 줄곧 제지업에만 관심을 쏟았다"고 말했는데요. 지금도 주룽제지의 핵심 품목이 전체 생산량에서 80% 넘는 비중을 차지할 만큼, 그는 거의 사업 다각화를 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의 사업에도 우여곡절은 많았습니다. 특히, 주룽제지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 언론이 주가 폭락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해 투자자들의 우려를 크게 고조시킨 적도 있습니다.
 
당시 주가 폭락으로 장인의 재산은 하루 사이 40% 이상 증발한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하지만 그는 오히려 "외부에서 2억달러의 채권을 매입했고, 직원들의 감봉도 없었다'"며 파산 신청 루머를 잠재웠습니다.
 
장인은 아직도 자신의 회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높은 잠재력을 갖춰 높은 투자 가치가 있다"고 자신합니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굳건한 정신도 강조하면서요.
 
그는 힘들었던 2008년에 베트남에 있는 한 제지 공장의 지분 60%를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이를 바탕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 시장에서도 사업을 넓혀가고 있는데요.
 
어머니처럼 푸근한 인상에도 내면에 강인함을 지닌 장인 회장, 그는 지금도 오뚝이 정신으로 무장한 채 세계 시장에서 기회를 찾고 '중국의 오싱'으로 전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