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외국에는 스펙준비라는 게 따로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당당하게 '스펙, 그거 없으면 정규직 못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열린채용이라는 말을 들어 봤지만 실감하는 건 하나도 없고 스펙을 안보는 대신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아 줄을 세우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 국내에서 취직하겠다는 꿈이 싹 사라졌어요."
외국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원모씨(25세·여). 전공을 살려 국내 금융권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2년간 정규직 채용에 매번 낙방했다. 대신 지금은 공기업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유학파에 뛰어난 전공실력과 영어능력을 갖춘 원씨는 왜 매번 취업에 실패했을까.
원씨를 만나기 전까지 기자는 혹시 그의 구직 목표가 너무 높아 웬만한 곳은 성에 안 차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보니 취업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해외에서 공부해 국내 구직자처럼 취업용 스펙쌓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서울시내 기업가 전경(사진=뉴스토마토)
정부와 기업마다 열린채용을 강조하며 스펙타파를 외치지만 정작 고용현장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최근 잡코리아가 국내 기업 인사담당자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93.0%가 '입사 지원자들의 스펙이 과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고, 가장 쓸모없는 스펙으로 어학연수, 봉사활동, 학벌, 토익 등을 꼽았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취업 준비생 810여명에 벌인 조사결과는 전혀 다르다. 응답자의 97.5%가 구직과정에서 '스펙의 벽'을 느꼈다고 답했다. 원씨처럼 스펙위주의 고용시장에서 열린채용을 기대하고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가 '스펙의 벽'만 깨닫고 좌절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특히 알바천국이 구직자 780여명에 대해 벌인 설문에서는 53.3%가 '원래의 목표를 바꿔 취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고, 취업을 못 하는 이유로는 '스펙이 부족해서'라는 응답이 48.9%나 됐다. 스펙 거품 탓에 취업이 너무 어렵자 전공과 적성을 살리려는 뜻을 접거나 해외로 구직의 눈을 돌리는 경우가 10명 중 3인 셈으로, 그야말로 인재 낭비다.
◇구직자 스스로 생각하는 취업을 못 하는 이유(자료=알바천국)
그렇다면 사회 전반의 스펙타파 구호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스펙쌓기가 일어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정부와 기업의 열린채용 의지는 보여주기식 헛구호에 그친 걸까.
최근 삼성의 대학총장 추천제 도입 추진에서도 알 수 있듯 정부와 기업은 스펙형 인재보다 성실성과 직무능력을 두루 갖춘 참 인재 찾기에 고심하는 중이다. 서류-필기-면접으로 이어지는 기존 채용전형에서 벗어난 다양한 채용방식 발굴에 골몰하고 있었다.
다만 스펙위주 고용을 타파하자는 사회적 합의에 비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열린채용 수준은 문제로 지적된다. 전체 공채 인원 중 스펙타파 채용 비중이 높지 않고 열린채용 분위기가 갓 형성된 탓에 이것이 제대로 정착될지 구직자 스스로도 불안해하고 있다.
잡코리아가 구직자 470여명에 대해 벌인 조사만 봐도 10명 중 2명은 '열린채용이 취업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답했으며, ▲별도의 자격제한이 있을 것(51.7%) ▲고학력자를 선호할 것(22.5%) ▲열린채용을 하는 기업이 적을 것(15.7%)이라고 우려했다.
열린채용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열린채용 보급 초기는 단순히 채용공고만 바뀌거나 새로운 기준이 정립되는 과도기인만큼 스펙타파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취업 준비생의 구직 목표 기업(자료=전국경제인연합회)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경제성장 측면에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한 화두고 박근혜정부는 줄곧 고용률 70% 달성을 강조했다"며 "경제와 사회 불안으로 젊은층이 점차 안정지향적으로 바뀌는 상황에서 열린채용을 확산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채창균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원도 "기업이 채용 기준을 간소화하고 그 기준을 사전에 공시(스펙 공시제)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채용 기준을 투명하게 관리하도록 정부가 유도하고 실제 직업세계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며, 청년층의 업무능력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신호체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할 때부터 진로에 맞춰 대학·학과를 선택할 수 있게 대졸자 취업통계와 직업별 임금, 직장별 취업률 등의 정보공개를 확대하자는 제안도 있다. 진로 선택 때부터 정보의 비대칭이 줄면 '남들 좇는 스펙쌓기'를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만큼 고용시장에서 공급을 담당하는 취업 준비생의 인식전환 노력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토익이나 봉사활동, 학벌 등 '점수 매기기식' 스펙쌓기는 과감히 버리고 원하는 직무와 업종에 대한 실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철행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용노사팀장은 "취업 준비생의 예상과 달리 기업은 신규 채용 때 구직자의 스펙보다 도전정신과 열정 등을 중시하며 이런 역량을 알아보기 위해 인·적성 검사와 실무면접, 토론 면접 등을 활용하고 있다"며 "취업 준비생들은 목표하는 회사에서 선호하는 인재상에 부합하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
<뉴스토마토는 오는 18일 서울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미래 인재 컨퍼런스 2014'를 개최합니다. 우리사회 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한편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상을 제시하는 논의의 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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