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한은정기자] 퇴직연금 확정기여형(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의 투자규제가 완화됐지만, 실제 퇴직연금시장은 적극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려는 개인투자자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5일 금융위원회는 퇴직연금 DC형과 IRP에 대해 투자가 금지됐던 주식형 펀드와 주식혼합형 펀드에 대해 가입자별로 적립금의 40% 이내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기존에는 확정급여형(DB형)만 주식형 펀드와 주식혼합형 펀드 투자가 가능했다.
부동산 펀드도 임대형 부동산 펀드에 한해 적립금의 40% 이내에서 투자할 수 있다.
DB형은 기존 퇴직금제도처럼 퇴직 후 받는 돈이 확정돼 있는 것으로 회사가 운용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방식이다. 반면 DC형은 근로자가 퇴직금을 직접 운용해 수익률에 따라 은퇴 후 연금급여액이 달라지고 그 위험도 근로자가 부담하는 것으로 해외 사례 등과 비교할 때 운용규제가 과도하게 엄격하다는 판단에 따라 완화를 결정했다.
IRP는 근로자가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금을 자기 명의의 퇴직 계좌에 적립해 연금 등 노후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제도가 개정된지 4개월이 됐지만, 대부분의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관련 시스템 구축과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당국인 금융위원회는 규제 완화 이후 시스템 구축이나 판매 등은 업계의 몫이라고 단언했다.
◇DC형 주식형펀드 투자 미미..규제 완화 하나 마나
당초 DC형과 IRP형에 대한 투자규제가 완화되면서 개인투자자들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퇴직연금자산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주식형 펀드에 대한 개인투자자들의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은것으로 나타났다.
2일 펀드평가사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총 340개 퇴직연금 펀드 가운데, 국내주식형 펀드는 33개, 국내주식혼합형 펀드는 9개, 해외주식형 펀드는 8개, 해외주식혼합형 펀드는 2개로 집계됐다.
대부분은 채권형 펀드와 채권혼합형 펀드로, 주식형 펀드와 주식혼합형 펀드를 합친 수는 전체 퇴직연금 펀드의 15%에 불과하다.
제도를 개정한 지난해 12월5일 이후에 3개 펀드가 새롭게 설정됐지만, 모두 채권형이나 채권혼합형 펀드다. 부동산 펀드는 아예 없다.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영업자료 통계에 따르면, 1월말 기준으로 DC형의 주식형 펀드 적립금운용규모는 3억원, IPR형의 주식형 펀드 적립금운용 규모는 7억원으로 집계됐다. 같은기간 DC형 혼합형 펀드의 적립금운용 규모 1조2783억원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현재 DC형 적립금 12조3289억원 가운데 21.7%인 2조6806억원만이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되고 있고, 77.3%인 9조5337억원은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집중돼있다.
당초 기대와는 달리 위험자산은 외면되고,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몰리며 퇴직연금의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사업자 "리스크 무릅쓰고 상품 판매 안해"
DC형 투자규제 완화를 둘러싸고 퇴직연금사업자들과 당국의 목소리는 제각각이다. 일부 은행과 증권사에서는 아직 판매를 위한 제대로 된 시스템도 갖추지 못한 상태다.
퇴직연금사업자 대부분은 "금융당국에서 규제만 풀어줬지 정확한 지침을 내놓지 않아 새로운 상품을 내놓거나 판매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이다.
퇴직연금 DC형을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은 '가입자의 주식형 펀드 자산을 40% 이내로 유지하는 것'이지만, 이 규정에 대해 제대로 된 지침이 없다는 것.
한 업계관계자는 "적립금의 40%까지 주식형 펀드에 투자할 수 있지만, 자산 비중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며 "3월말까지 만들기로 했지만 늦어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주식형 펀드 자산이 주가상승 등으로 변동돼 총 적립액의 40%이상으로 늘게 되면 다시 40% 이내로 줄여야 하는데, 사전에 고객에게 미리 동의를 구하고 자산을 줄일것인지, 고객에게 어디까지 동의받아야 하는지 등 업무 정리가 안된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만약 주식형 펀드 평가금액이 총 적립액의 40%가 넘게되면 고객에게 통지를 하고 반대매매를 해야 하는데 고객이 수신거부를 하거나 부재중인 상황 등 여러가지 변수가 있어 제대로 된 운용을 할 수 없는 실정이고, 이는 자칫하면 사업자의 신뢰성에도 타격을 입힐수 있다"며 "이런 리스크에 대한 방지책이 마련돼있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번 개정에 대해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수요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업자가 리스크를 무릅쓸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또 "기존에 자산 100%를 채권혼합형 펀드로 운용하던 가입자가 이번 개정에 따라 주식형 펀드로 40%를 운용할 경우 나머지는 펀드로 운용하는게 아니라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해야 한다"며 "사실 퇴직연금사업자에게는 득이 될게 없는 개정이니 아쉬울 것도 없다"고 언급했다.
이번 투자완화 자체가 가입자들의 연금자산을 늘리는데 유명무실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주식형 펀드 투자를 적립금의 40% 이내로 규정해놓다보니, 아무리 좋은펀드에 투자해 더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황이라도 평가금액의 40%가 넘게 되면 반대매매를 해야한다"며 "퇴직연금자산을 늘리려는 취지에 맞도록 제도를 개선하려면 평가금액이 아니라 납입금을 기준으로 해서, 늘어난 수익은 40%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분간은 대부분의 운용사나 판매사에서 DC형 가입자들을 위한 주식형펀드 출시나 판매계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종합안내 사이트의 문구들
◇협회· 금융위 "세부 지침 문제될 일 없다"
퇴직연금사업자들의 입장에 대해 금융투자협회나 금융위원회는 문제될 일이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세부적인 지침과 관련해서는 이미 금융투자협회쪽에서 표준약관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당국이 관련 방안을 내놓으면 세부적인 지침은 업계가 자율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업계에서 태스크포스(FT)팀을 만들어 금융감독원장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금융위는 지원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퇴직연금사업자의 DC형 자금 운용에 있어서 이미 감독규정이 다 나와있고, 사업자들이 그에 따라 운용·판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퇴직연금 감독규정에 따라 자산배분에 관해서는 주식형 펀드 납입금액이 총 적립금의 40%를 넘으면 고객에게 통보를 하도록 되어 있다"며 "평가금액 기준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퇴직연금 DC형을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40%'의 기준을 사업자와 협회가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사업자들이 이미 기존의 펀드에 클래스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판매를 하고 있고, 시스템 때문에 문제될 일은 없다"며 "퇴직연금은 연납이 많아, 규정개정이 얼마되지 않아 12월에 들어온 적립금을 펀드로 유치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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