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책 읽는 밤을 위하여
2012-11-22 16:00:00 2012-11-22 16:00:00
주말에 아내와 신촌 헌책방 나들이를 했다. 전세살이에 자꾸 책이 늘어 훗날 이삿짐이 부담스러웠던지 아내가 더 이상 보지 않는 책들은 정리하겠노라 선언한 터였다. 내외가 모두 책 욕심이 만만찮아 한두 번 훑어본 뒤론 내내 서가에 묻어둔 꽤 많은 책을 서가에서 해방시켰다.
 
트렁크 그득 싣고 간 책을 책방 앞에 풀어놓으니 중고서점 경영 30년차라는 나이 지긋한 책방주인이 쓱 둘러보고 하는 말이 "이런 책은 폐지 값도 못 줘요. 경기 좋을 때 신간으로 쏟아져 나왔다가 불황일 때 또 제일 많이 헌책방으로 나오는 게 이런 책이에요. 찾는 사람은 없고 팔려는 사람만 넘치는 바람에 재고가 너무 쌓여 고민이야."
 
여기서 '이런 책'이란 소위 '경제·경영/자기개발/실용서'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학창시절부터 사 모았던 문학·인문·사회과학 서적들, 감히 완독할 엄두도 못 내면서 서평 보고 홀딱 반해 샀던 벽돌 두께의 교양서들은 남겨 두고 '이런 책'들만 추려 갔더니, 시장경제의 냉정한 논리를 담은 핀잔만 듣고 왔다.
 
덤으로 "인문/예술 분야 책은 최소 정가의 10%로 매입하니 많이 가져 오시고, 안에 들어가서 천천히 책 구경 하시다 가라"는 영업 멘트까지.
 
출판업계만큼 세상의 트렌드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산업분야도 또 없을 것이다.
 
일례로, 교보문고가 10년간 부동산, 홈 인테리어 서적이 판매된 경향을 분석한 것을 보면, 2002년 1월1일부터 11월19일까지 팔린 부동산 재테크 서적은 3만6000권인데 비해, 홈 인테리어 서적은 3000권에 불과했다.
 
부동산 열풍이 한창이던 2008년 같은 기간 동안에는 부동산 책이 9만3600권, 인테리어 책은 1만2100권 정도였는데, 올해는 부동산 쪽이 4만3000권에 그친 반면, 인테리어 쪽은 5만6800권이나 팔렸다. 홈 인테리어 서적이 부동산 투자 서적보다 더 많이 팔린 건 올해가 처음이란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집을 사고 팔기 어려워진 만큼 지금 집을 고치고 꾸며서 살겠다는 사람이 많아진 것의 반영으로 보인다.
 
최근 출판계의 이색적인 출간 경향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세태를 반영한다.
 
지난 16일 통계청이 발표한 올해 3분기 가계동향을 보면 소득은 지난 해 같은 분기보다 6.3% 늘었지만 소비는 1.0% 늘어나는 데 그쳤다. 소비자물가 상승분 1.6%를 고려하면 소비는 오히려 줄어든 양상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갑을 닫고 있는데 오히려 분량이 1000페이지는 거뜬히 넘고, 책값도 3만원을 훌쩍 넘는 묵직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혁신의 예언자'(글항아리, 928페이지. 4만원), '막스 베버'(길, 1008페이지. 4만8000원), '한스 큉의 이슬람'(시와진실, 1264페이지. 4만5000원), '논어로 논어를 풀다'(해냄, 1408페이지. 5만8000원) 등이다.
 
살림살이도 팍팍한 판에 책값마저 이리 비싸니 누가 사볼까 싶지만, '논어로 논어를 풀다'는 2000부가 팔렸고, '혁신의 예언자'는 출간 열흘 만에 900부가 독자 품에 안겼다고 한다. 사 볼 사람들은 비싸도 산다는 말일 터.
 
출판계가 불황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애독자 지키기'로 읽힌다. 몇날며칠이 걸려도 독파하고픈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탄탄한 책, 집에 서가를 하나 더 들이더라도 기꺼이 갖고픈 소장욕구를 충족할 만한 고급스러운 책을 출간하자는 컨셉트가 꽤 성공적이다.
 
따뜻하거나 말랑말랑한 '영혼의 양식'을 편애하는 경향 역시, 출판계에 반영된 세태 중 하나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밝은세상, 1만2000원),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쌤앤파커스, 1만4000원), 김난도의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오우아, 1만4000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창비, 1만8000원),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달, 1만3800원) 등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완전범죄를 꾸미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새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빅 빅처'는 스릴러 소설, 나머지는 제목에서도 유추되듯 자기 성찰이나 여행 관련 에세이다. 흥미 위주의 가벼운 독서경향이 없진 않지만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로서 책의 가치는 여전한 것 같다.
 
책을 주제로 데스크칼럼을 쓰고 있는 지금, 문득 낡은 책의 종이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듯하다. 오늘 밤 자기 전엔 잠시 아이패드를 제쳐 두고, 못다 읽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어야겠다.
 
김종화 생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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