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영택기자] “이번에 임원인사 소식 들었어?”
“회사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도 다녀왔는데, 쉽게 내치겠어?” “근데 상무님 책상에 짐이 주는 걸 보니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
지난달 31일 서울 도심의 한 대기업 본사건물 앞 흡연공간.
삼삼오오 모인 이 기업 직원들이 담배 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내 뱉으며 푸념 썩인 넋두리를 이어갔다.
이맘때가 되면 기업들은 내년 경영전략과 투자, 채용 규모 등 계획을 수립하느라 분주하다.
특히 승진인사는 직장인들이 가장 예민해 하는 사안으로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올해는 장기화된 경기침체 탓에 팽팽한 긴장감을 넘어 침울한 분위기가 짙게 깔리고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부터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경기침체는 좀처럼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최근엔 내수침체와 환율 하락까지 겹치면서 불황이 장기화하는 분위기다.
기업들은 고육지책으로 사업·인력 구조조정뿐만 아니라 채용·신규 투자까지 축소하면서 앞다퉈 비상경영에 돌입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가장 초조해지는 건 임원승진을 앞둔 만년부장들이다. 임원승진 탈락은 퇴직 임박이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부장은 “임원승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는 성과”라면서 “말단사원일 때 성과주의의 이기적인 부장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부장처럼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어느덧 나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다른 대기업 부장 역시 “올해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서 연말 인사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할 전망”이라면서 “젊은 조직을 향한 세대교체는 간접적으로 회사를 떠나라는 압박이어서 가슴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1000명 가운데 8명만이 이른바 '별'을 다는 것으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는다.
설령 이 '바늘구멍'을 운좋게 통과했다 해도 안심할 일은 아니다.
상무만 7년째 하고 있는 한 대기업 임원은 인사시즌만 되면 한 가지 버릇이 도진다고 했다.
인사 발표 한달 전부터 책상의 짐들을 조금씩 챙겨 퇴근을 하고, 이 기간을 무사히(?) 넘기면 다시 짐을 풀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 평생 젊음을 바친 직장을 떠나는 내 뒷모습이 후배들에게 초라하게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라며 씁쓸해 했다.
이를 지켜보는 후배들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다.
입사 후 말단 사원에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조직의 꽃인 임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직장인 모두의 공통된 꿈이자 목표다.
그런데 눈앞에서 추풍낙엽처럼 퇴출되는 선배들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목표에 대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마치 내 일처럼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그나마 임원을 달고 나오면 고문이나 계열사 임원 등으로 재취업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부장으로 퇴직하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말단 사원부터 조직의 수장인 부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국가 경제에 버팀목이 돼 온 만년부장들.
이 시기 힘없이 떨어지는 ‘추풍낙엽’은 만년부장들의 어깨를 한없이 움츠려 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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