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과학으로 역사의 냄새 복원
화학·문헌·AI로 과거 ‘냄새 풍경’ 재구성
냄새는 감정을 움직이고 기억을 깨운다
2026-02-11 09:22:10 2026-02-11 15:30:12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Perfume)』에는 냄새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사람의 체취와 거리의 악취, 물건의 향을 구분해내며, 향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얼마나 강력하게 좌우하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소설은 허구지만, 한 가지 통찰만큼은 과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냄새는 이성보다 먼저 감정을 움직이고, 기억을 깨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유화와 사진, 유리 진열장 속 유물, 오래된 건물을 통해 대개 눈으로 역사를 배웁니다. 그러나 인간이 환경을 인식하는 가장 오래된 감각 중 하나는 후각입니다. 냄새는 설명 없이 감정을 바꾸고, 기억을 불러내며, 공간의 성격을 빠르게 규정합니다. 최근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이 후각의 힘에 주목해, 사라진 과거의 ‘냄새 풍경(smellscape)’을 화학 분석과 함께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얀 브뤼겔의 ‘후각’을 전시하면서 그림에 맞는 냄새를 만들어 퍼뜨려 관람객들이 그림 앞에 머무는 시간을 크게 늘렸다. (사진=프라도미술관)
 
후각, 기억으로 가는 빠른 통로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후각 정보는 감정·기억과 밀접한 뇌 영역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후각 경로는 다른 감각과 달리 시상을 거치지 않는 1차 경로를 통해 변연계(특히 편도체·해마)에 직접 전달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올릴 때 풍경보다 그곳의 공기, 곧 냄새를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특성은 일상 공간 설계에도 활용됩니다. 예컨대 백화점 1층에 화장품과 향수 매장이 배치되는 것은 향이 방문객의 긴장을 낮추고 체류를 유도하며 공간 전체를 ‘기분 좋은 곳’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냄새는 보이지 않지만, 행동의 속도를 늦추고 관찰과 탐색의 시간을 늘리는 심리적 완충 장치로 작동합니다. 이런 이유로 과학자들은 “냄새를 복원하면 과거를 더 가깝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문화유산과학연구소의 분석화학자 마띠야 스트를리치(Matija Strli?)는 문화유산의 향을 보존하는 연구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는 과거 런던 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지속가능 문화유산연구소(Institute for Sustainable Heritage)에 재직하던 시기, 1709년 완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 도서관의 냄새를 기록했습니다.
 
연구진은 공기를 비침습적으로 채집한 뒤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법(GC-MS)로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식별·분리해 냈습니다. 헥사날, 벤즈알데히드 같은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확인되었지만, 분자 목록만으로는 ‘냄새’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각 패널의 묘사를 수집해 화학 성분과 연결했고, 도서관 냄새의 ‘화학적 레시피’를 만들었습니다. 냄새가 정량 데이터와 정성 언어를 함께 갖춘 기록 가능한 대상이 된 것입니다.
 
스트를리치 연구팀은 고대 이집트 미라 9구가 보관된 공간의 공기를 분석하고, 후각 패널 평가를 결합했습니다. ‘나무 향’, ‘매운 향’, ‘달콤한 향’이라는 묘사는 소나무 기름, 유향, 몰약, 계피 같은 방부 재료의 흔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동시에 현대 보존 과정의 합성 살충제 성분도 검출되었습니다. 이 데이터는 제작 재료와 보존 상태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대이집트 박물관(2025년 11월1일 공식 개관)에서 방문객이 경험할 ‘미라의 향’을 재현하는 향을 개발 중입니다.
 
냄새 복원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은 특히 중요합니다. 물질이 남아 있는 유물과 달리, 많은 역사적 냄새는 문헌 속 표현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후각 유산 프로젝트 오듀로파(Odeuropa)는 AI를 이용해 7개 언어, 16만여건의 역사 텍스트와 4만여장의 이미지에서 냄새를 묘사하는 단어, 사물, 맥락을 자동 추출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250만건 이상의 ‘냄새 단서’는 데이터베이스가 되었고,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특정 시대와 장소의 냄새 풍경을 재구성했습니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냄새를 기록하고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럽 연합의 냄새 유산 보존 및 재현 프로그램인 오듀로파(Odeuropa)는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이미지에서 냄새와 관련된 요소를 식별내고 있다. (이미지=Odeuropa)
 
오듀로파, AI로 기록 속 ‘냄새’ 재현
 
AI는 단순히 단어를 찾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컨대 ‘연기’, ‘유황’, ‘부패’, ‘향’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을 학습해, 그것이 종교 의식인지, 전장인지, 도시 위생 환경인지 구분해 냅니다. 그 결과 워털루 전장의 화약 냄새, 17세기 암스테르담 운하의 공기, 16세기 설교에 묘사된 ‘지옥의 냄새’까지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은 얀 브뤼겔(Jan Brueghel the Elder)의 ‘후각’을 전시하면서 작품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미술관 측 설명에 따르면, 후각 체험 도입 이후 관람객의 체류 시간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났습니다. 향이 그림을 ‘보는’ 행위를 ‘머무는 경험’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각은 분자를 식별하기보다, “이 냄새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향이 불러오는 기억은 특히 생생합니다.
 
과학은 이제 냄새를 채집하고, 분해하고, 기록하고, AI로 해석하고, 다시 조합합니다. 도서관의 종이 냄새, 미라의 수지 향, 운하의 습한 공기, 전장의 화약 냄새가 데이터로 남습니다. 후각은 보이지 않지만, 과거를 체험하는 가장 감성적인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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