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탄광에서 일하다 얻은 진폐증이 산업재해로 인정됐다면, 퇴직 후 50년 지나 숨진 고인의 유족은 산재 유족급여를 받을 수 있을까요? 사망 원인이 의학적으로 명확치 않다는 주장을 뒤집고, '고인의 사망은 진폐증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재판부가 고인의 사망과 진폐증의 구체적 경과에 주목한 결과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모습. (사진=뉴시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3부(부장판사 윤강열)는 지난달 20일 70대 이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사건 시작은 50여년 전인 1977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씨는 1965년부터 1977년까지 경북 문경의 한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습니다. 그는 진폐증을 앓았고, 2005년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았습니다. 진폐증은 분진을 흡입해 생기는 폐질환입니다. 밀폐된 갱도에서 채굴을 하느라 분진과 돌가루 등에 시달리는 광부들이 자주 겪는 직업병입니다. 완치가 불가능한 이 질병으로 인해 이씨는 호흡곤란을 겪으며 응급실 입원을 반복하다 2021년 2월 끝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시체검안서에 기재된 직접 사인 역시 진폐증이었습니다.
이씨의 유족은 고인이 광부로서 얻은 진폐증은 업무상재해에 해당하고, 그로 인해 사망했다면서 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공단은 고인이 진폐증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유족급여를 주지 않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유족은 공단의 결정에 불복해 이번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을 심리한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판사 최수진)는 지난 5월 이씨의 사망과 진폐증 사이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면서 공단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이씨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인과관계에 관해 증명책임을 부담하는 원고에게 불이익한 방향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어 "2019년 최종 진폐정밀진단결과와 최종 장해등급만으로는 이씨의 진폐증이 사망을 야기할 정도의 중증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씨가 노환과 여러 기저 질환(위암·뇌질환·치매)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1심 판결은 법원 감정의 소견 중에서도 의학적 사망원인이 불명확하단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감정의는 "이씨의 사망과 진폐증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망인의 진폐도 기여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라는 소견을 제출했습니다. 광부라면 진폐증이 악화돼 사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씨는 탄광에서 퇴직한 때로부터 44년이 흘러 사망했습니다. 법원과 소견의는 이씨가 광부 일을 그만두고 수십년이 지난 만큼 사망한 원인이 진폐증 때문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유족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이씨의 진폐증 경과가 악화한 점을 눈여겨봤습니다. 재판부는 "심폐기능 장해정도, 즉 일초량(1초간 내뱉은 공기의 양)과 일초율(전체 내쉬는 공기 중 1초 동안 얼마나 내쉬었는지의 비율)이 참고치보다 낮게 측정되고, 기관지 확장 투여 이후에도 일초율의 변화가 없는 건 이씨의 폐활량 자체는 경도장애 수준이라 해도 만성폐쇄성 폐질환의 영향으로 호흡기능이 제한돼 있고, 장애 정도가 정상 범주를 벗어나 심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씨가 사망하기 직전 진폐증의 현저한 악화 양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도, 망인은 지속적으로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내원하는 등 호흡기 질환이 점진적으로 악화됐다"며 "고령으로 기저질환 등으로 추단할 다른 장기 기능 부전이 사망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고인의 사망원인으로 진폐증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진폐증과 기저질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씨를 대리한 임채후 변호사는 "탄광 노동자의 산재 사건은 입증이 쉽지 않아 인정받기 어렵다"며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병원기록, 감정의의 소견 등에 대해 의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규범적, 법리적 판단까지 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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