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트럼프와 이재명, APEC에서 두 사상의 전쟁
2025-11-04 06:00:00 2025-11-04 06:00:00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치사상의 충돌, 즉 트럼프의 ‘힘의 양자주의(bilateralism of power)’와 이재명의 ‘자유주의적 다자협력(liberal multilateralism)’이 맞붙은 무대였다. 겉으로 보기엔 트럼프의 접근이 더 실리적이고 강하게 보인다. 세계는 19세기식 강대국 정치로 귀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자유주의 질서의 뿌리 깊은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 
 
트럼프는 자유주의적 다자 질서를 “미국의 손발을 묶는 족쇄”로 간주했다. 그의 외교는 거래 중심의 외교(deal diplomacy)이며, 모든 협상은 ‘0의 합(zero-sum)’ 게임으로 계산된다. APEC 정상회의에서도 그는 공동선언문보다 개별 정상과의 회담에 집중했고, 다자간 규범보다는 “힘의 직접적 교환”을 택했다. 이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전형으로, 국가 간 무정부 상태 속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다. 이 질서에서 힘이 없는 개발도상국들은 국제법과 국제질서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게 불안의 원천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WTO, TPP, 파리협정 등 다자 협약에서 이탈하며, APEC조차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전문가들은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로 상징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제 체제는 그의 단독행동주의에 일정 부분 내성을 키워가며, 자율적 규범 강화와 연대 회복의 계기를 맞고 있다. 중견국들의 집단지성이 미국 패권을 공백을 메우는 대안적 질서의 등장이다. 그 선두에 이재명 대통령이 있다. 
 
이 대통령은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철학을 바탕으로, 다자주의의 가치와 실용주의를 결합하려 한다. APEC 개막 전날 “연결, 혁신, 번영”을 모토로 내건 CEO 서밋에서 이 대통령의 연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연설을 통해 이재명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규범 창출자이자 협력의 중개자 역할을 강화하는 외교”를 지향함을 분명히 표방했다. 트럼프가 외치는 미국 우선주의와 반대되는 내용이다. 대통령은 미국·중국 양강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 다자협력체(AIIB, APEC, RCEP 등)를 통해 한국이 “균형자이자 연결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미국에 편승할 것을 주문하는 보수 언론과 우리 사회의 동맹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언사들이다. 또한 28일 일본에서 개최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보여진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도 다른 방향이다. 일본은 우파 총리는 잠시 자율성을 외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맹의 황금시대”를 외치며 미국식 힘의 정치로 기울었다. 
 
이재명의 ‘신(新)포용경제 네트워크’ 구상은 나쁘게 말하면 미중 사이의 ‘양다리 전략’이고 좋게 말하면 성숙한 ‘중견국 외교’다. 다자주의 제도는 느리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트럼프의 양자주의가 당장의 힘을 과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단순히 미국의 리더십으로만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구축된 규범, 제도, 상호 의존적 네트워크의 집합체다. 바로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다. 그것을 포기한 미국이 떠난 자리에 한국이 미국의 유산을 활용하여 세계 중견국과 연합을 외치는 지금, “미국 없는 미국의 질서”를 중견국들이 대체하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의 다자주의에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개도국들은 미국 없는 질서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역사는 “누가 더 큰 힘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협력을 지속시켰는가”를 기억한다. 그 점에서, 트럼프의 양자주의가 세 보이는 지금도 자유주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끈질긴 질서의 언어로, 여전히 국제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일견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자강과 실용으로 다자간 협력을 추구하는 한국의 선택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자유주의의 투쟁일 것이다. 트럼프가 강해 보일지 몰라도 이 순리까지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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