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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9월 18일 11:11 IB토마토 유료 페이지에 노출된 기사입니다.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국내 주요 연기금·공제회가 올해 하반기 출자사업에서 사모펀드(PE)와 벤처캐피탈(VC) 분야 모두 신생 운용사 문턱을 낮추고, 벤처 투자 비중을 확대하는 움직임이다. 관련 업계에선 대형 위주였던 기존 체계에서 벗어나 루키리그를 재도입하거나 최소 펀드 결성 규모를 완화하는 것에 대해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일각에선 추가적인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진=우정사업본부)
출자 문턱 낮춘 연기금·공제회…규모도 2022년 이후 가장 커
1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출자자(LP)인 과학기술인공제회, 군인공제회, 우정사업본부,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중소기업중앙회(노란우산) 등은 최근 올해 하반기 출자 공고를 연달아 발표했다.
과기공은 지난 10일 위탁운용사(GP) 모집 공고를 내고 2025년 블라인드펀드 출자사업을 통해 총 3100억원을 집행한다고 밝혔다. 지난해(2600억원)보다 500억원 늘어난 규모로, PE에 1700억원, VC에 1400억원을 배정하겠다고 밝혔다. 출자 구조는 대형·중형·루키 등 3개 리그 체계로 운영되며, 각 부문에서 루키리그를 재도입해 신생 운용사 지원을 강화했다.
군인공제회도 올해 총 4800억원을 출자한다. PE 3400억원, VC 14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각각 700억원, 200억원 확대했다. 특히 PE 최소 결성 규모를 기존 ‘대형 6000억원·중형 2000억원 초과’에서 ‘1000억원 이상’으로 완화했고, VC 역시 최소 400억원으로 낮추면서 중소형 하우스의 참여 폭을 크게 넓혔다.
우정사업본부 역시 지난해까지 대형 펀드에만 자금을 공급했으나, 올해는 중형(2500억원 이상), 소형(1000억~2500억원) 리그를 신설해 출자 대상을 다변화했다. 대한지방행정공제회는 2019년 이후 중단됐던 PE 블라인드펀드 출자사업을 6년 만에 재개해 2000억원을 공급할 계획이다. 중소기업중앙회(노란우산)도 일반·중소형 리그로 나눠 3000억원을 출자하며, 소형 펀드에도 안정적 자금을 지원한다.
국내 주요 LP 관계자는 “최근 출자기관들이 일제히 루키리그를 재도입하거나 최소 결성 규모를 낮추는 것은 시장 다양성 확보와 동시에 벤처·중소형 운용사에 대한 투자 확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형사 중심에서 벗어난 자금 공급이 벤처투자 활성화와 투자 생태계 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벤처투자는 과거 벤처투자 호황기였던 2022년 이후 가장 많은 규모로 집행되고 있다. 중기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처투자는 전년동기 대비 3.5% 늘었고, 벤처펀드 결성 규모는 19.4% 늘었다.
벤처투자 규모는 상반기 기준 3조1710억원(2020년), 6조5725억원(2021년), 7조6442억원(2022년), 4조4930억원(2023년), 5조4856억원(2024년), 5조6780억원(2025년) 등 상승세를 보였다. 벤처펀드 결성 규모도 2조2432억원(2020년), 5조8929억원(2021년), 8조6821억원(2022년), 4조7013억원(2023년), 5조1662억원(2024년), 6조1681억원(2025년)으로 특히 연기금·공제회와 일반법인 등 민간 부문에서의 출자가 전년 대비 130%, 58% 증가하면서 상승세를 견인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사진=연합뉴스)
유니콘 기업에 고작 1700억원…일각에선 제도 개선 목소리도
다만 관련 업계에선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례로 국내 대표 유니콘 기업인 퓨리오사AI는 최근 시리즈C 브릿지 라운드서 1700억원 모집에 그쳤다. 퓨리오사AI는 올해 상반기 화장품 생산·판매 기업인 비나우와 함께 처음으로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은 기업이다. 벤처업계서는 퓨리오사AI와 비나우가 인공지능(AI)과 K-뷰티 산업에서 얼굴 마담격인 셈이지만, 기대만큼 자금이 모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면 중국의 경우 AI 스타트업 기업들에 대한 투자 규모가 천문학적이다. 문샷AI(Moonshot AI)는 지난해 2월 진행한 시리즈B 라운드에서 10억달러(1조3300억원)를 유치했으며, AI 스타트업 기업인 미니맥스(MiniMax)와 지푸AI(Zhipu AI)도 최근 각각 3억달러(4161억원)와 30억위안(5920억5000만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유치했다. 주요 LP는 글로벌 펀드, 상하이 국유자산, 텐센트, 알리바바 등으로 알려졌다.
특히 퓨리오사AI의 경우, 반도체 팹리스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투자 규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 초부터 메타의 1.2조원 인수 제안이 들어오는 등 이미 기술력을 인정받은 기업인 데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생산업체와 시너지도 적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정영범 퓨리오사AI 상무가 올해 초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미국, 중국 AI 반도체 개발 업체는 조 단위 투자를 받는 데 반해 퓨리오사AI의 경우 2000억원도 안 되는 투자금으로 경쟁하는 실정”이라고 아쉬움을 내비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 국내 주요 연기금·공제회가 VC 출자 규모를 늘리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동안 업계에선 더 많은 자금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특히 33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의 벤처펀드 출자 허용은 글로벌 경쟁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불가피하지 않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엔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퇴직연금(401k)을 가상자산, 사모펀드, 부동산 등 대체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이미 제도 개선을 끝낸 상황이다.
일각에선 투자 규모와 더불어 글로벌 창업자를 위한 경영권 방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창업자의 지분율이 낮아져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일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해 “젊은 창업자나 일부 기업에 한해서 골든셰어(황금주)를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생각한다”고 발언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해 황금주,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전무한 것은 사실”이라며 “최근 국내 LP들이 루키리그 부활이나 VC 투자를 확대하는 분위기지만, 정작 유니콘으로 등극한 기업에 대한 투자나 경영권 방어 제도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면 해외 기업에 경영권을 주고 매각하거나 해외 상장으로 이탈을 고려하게 된다”고 전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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