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1일, 일본 아베 내각은 역대 정부들의 입장을 뒤집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각의 결정을 내렸다. 헌법 제9조의 평화주의(전쟁 포기·전수 방위 원칙)를 뒤집고 자위대의 해외 무력행사를 가능하게 바꿔버린 변경 내용도 충격적이었던 데다, 헌법 조문은 바꾸지 않고 행정부가 헌법에 대한 해석 변경만으로 헌법의 의미·적용 범위를 바꿔버리는 '해석개헌'(解釋改憲)을 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일본에서는 드물게 수만명이 국회 앞을 메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일본헌법학자협회가 "명백한 해석 개헌이며, 헌법 9조를 무력화시킨다"고 비판 성명을 냈으나 아베 내각과 자민당은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자위권"이라는 '해석변경(解釋變更)' 논리로 맞섰다.
자민당이 장악한 일본 의회는 내각 결정을 이어받아 그다음 해인 2015년 9월에 자위대가 '무력 공격 사태'뿐 아니라 '존립 위기 사태'에도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안보관련법을 제정했다.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탈바꿈하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2차 대전 후 일본 안보정책의 근간이 대전환한 것이다. 이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보통국가론(普通國家論)'이 현실로 나타난 결정적 장면이자, 그가 일본 보수·우익의 총아로 자리매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뉴시스)
2014년 아베, 헌법 조문은 그대로 두고 '해석'으로 개헌…'집단적 자위권' 행사 법제화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 관련 질문에 "무력 공격이 일어나면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2015년에 아베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게 법제화하면서 처음 제시한 개념인 '존립 위기 사태'가 10년 만에 역할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는 일본이 직접 군사 공격을 받는 '무력 공격 사태'와는 다른 것으로 가령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미군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이 이를 '존립 위기 사태'로 규정하면 자위대가 중국을 상대로 참전할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는 "전함을 사용하고, 무력행사도 있다면 어떻게 봐도 존립 위기 사태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단순히 민간 선박이 늘어서서 (배가) 지나가기 어려운 것은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하지 않겠지만, 전쟁 상황에서 해상이 봉쇄되고 드론이 날아다닌다면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구체적으로 사례를 열거한다 해도, 복잡 미묘한 사건이 넘쳐나는 전쟁 상황에서 '존립 위기 사태'에 대한 규정은 일본 정부의 자의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일본 현역 총리가 대만 사태에 무력 개입 가능성을 공식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집단적 자위권'을 법제화한 아베 전 총리도 총리 재임 때는 명시적으로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았고, 지난해 2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총리도 "존립 위기 사태 해당 여부는 개별적, 구체적 상황에 따라 정보를 종합해 판단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피해 나갔다.
일본 외무성은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총리 개인의 생각"이라고 했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도 "구체적 상황에 따른 대응을 언급하면 일본에 대한 공격이 용이하게 된다"고 거리를 뒀다. 야당에서도 "역대 총리들도 일정 선을 그어왔던 문제인데 다카이치 총리가 혼자 내달리는 위험성이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간 일본 정치권이 전체적으로 우경화 흐름을 강화해왔다는 점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총대를 메고' 나선 성격이 강해보인다. 그는 10일 의회에서도 관련 추궁에 "앞으로 반성한다는 측면에서 (존립 위기 사태의) 특정한 경우를 가정해 이곳에서 명확히 말하는 것은 신중히 하고자 한다"면서도 "정부의 종래 견해에 따른 것으로 특별히 철회, 취소할 생각은 없다"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다카이치 총리의 일련의 발언은 아베 전 총리가 2014년 '해석 개헌'이라는 변칙까지 써서 법제화한 '집단적 자위권'이 법전을 떠나 현실 정책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여자 아베' 다카이치 총리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안은 일본과 중국 간 갈등 요인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 중국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은 나오지 않고 있으나 쉐젠 주오사카 중국 총영사는 엑스(옛 트위터)에 일본어로 "더러운 목을 벨 수밖에 없다", "'대만 유사는 일본 유사'는 일본의 일부 머리 나쁜 정치인이 선택하려는 죽음의 길"이라고 비판했다. 비판이 커지자 "더러운 목을 벨 수밖에 없다"는 글은 삭제했으나, 일본 정부 대변인인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중국의 재외 공관장으로서 매우 부적절하다"며 이어 "중국 측이 명확한 설명을 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사진=뉴시스)
직전 일본 방위상, 미국에 "한반도와 동·남중국해, 하나의 전쟁 구역으로 묶자" 제안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고 미·일 연합작전이 전개된다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될까. 또 한국군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자동적으로 '연루'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한반도와 대만이 같은 전쟁터로 묶이게 되면, '공동 대응'의 의무를 떠안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을 동북아의 전략기동군으로 활용하는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직전 일본 방위상인 나카타니 겐은 지난 3월에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 장관에게 한반도와 동·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쟁 구역(戰域)으로 묶자고 제안했다.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다자 안보 협력 체제 구축을 염두에 두고, 이 지역을 단일 군사 작전이 가능한 '원 시어터'(One Theater)로 설정, 중국 위협에 공동 대응하자는 구상이다. 일본은 사전에 이를 우리에게 알리거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이렇게 했다.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 강화 추세와 미국의 관세 압력을 배경으로 최근 국내 재계 일각에서는 한국과 일본인 유럽연합 수준으로 경제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본의 최근 움직임을 볼 때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공동체' 수준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일본이 ‘전쟁 가능 국가’로 변모하는 '해석 개헌 체제'를 우리가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면 중국 등에는 한국이 '미·일·대만 축'의 준동맹국으로 분류된다는 뜻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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