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편 절실③)‘물량의 시대’는 갔다…‘고부가’만이 살길
감산은 ‘숨구멍’…해법은 차별화
2025-09-11 14:12:50 2025-09-11 15:02:43
[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한때 양으로 밀어붙이던 전략은 중국의 거대한 물량 공세 앞에 힘을 잃었고, 기술과 가치의 경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습니다. 조선업이 LNG선으로 새로운 바다를 열고, 반도체가 초미세 공정과 AI 반도체로 또 다른 전성기를 개척했듯, 전통 제조업 역시 전환의 길목에 서 있습니다. 감산과 통폐합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장치일 뿐, 근본적 돌파구는 제품과 시장을 새롭게 짜는 데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HD현대의 LNG 운반선. (사진=HD현대)
 
조선이 간 길, 석화·철강의 미래
 
국내 조선업은 ‘고부가가치’ 전략의 성공 사례를 보여줍니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전문 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조선업은 범용 선박 시장에서 중국에 밀렸지만, LNG 운반선으로 방향을 튼 이후 글로벌 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전 세계 LNG선 발주량의 100%를 수주하는 등 독보적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 조선은 LNG선뿐 아니라 암모니아, 액화CO₂, 메탄올 추진선 등 차세대 에너지 전환 선박 분야로 확장하며 재도약 중입니다. ‘남이 못 만드는 것’으로 포지션을 재정의해 생존과 성장을 동시에 꾀한 것입니다. 
 
석유화학 부문에서는 ‘스페셜티 케미컬’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2차전지용 전해액·용매,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특수가스, 의료용 바이오 소재, 자동차·전자용 고기능성 플라스틱, 친환경 케미컬 리사이클링 제품 등이 대표적입니다. 
 
해외 기업들도 비슷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 아사히카세이와 미쓰비시는 범용 대신 고기능 소재와 전자재료에 집중하며 안정적 수익 구조를 확보했고, 독일 바스프(BASF)는 배터리 소재와 바이오 기반 케미컬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했습니다. 미국 다우케미칼은 고성능 실리콘과 의료용 소재를 강화하며 범용 의존도를 낮췄습니다. 
 
글로벌 선두 기업과 비교하면 투자 속도와 규모에서 격차가 크지만 국내 석유화학 업계도 체질 전환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LG화학은 전지 소재와 바이오·리사이클링 제품을 앞세워 글로벌 선두와 경쟁 구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사명까지 바꾼 SK지오센트릭은 친환경 순환경제 기업으로의 변신을 선언했고, 케미컬 리사이클링·바이오 플라스틱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금호석유화학은 합성고무·에폭시·특수수지 등 스페셜티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차별화된 경쟁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경북 포항시 영일대 해수욕장에 설치된 '철 그 이상의 가치 창조' 조형물 너머로 보이는 철강산업단지. (사진=연합뉴스)
 
철강 산업은 ‘전기차 전환’과 맞물려 고부가 제품 수요가 늘고 있습니다. 초고장력강(기가스틸), 무방전 강판, 모터코어 강판 등으로 라인업을 확대하는 흐름이 대표적입니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2017년 글로벌 신규 차량의 약 60% 이상이 글로벌 자동차용 강판 중 첨단 고강도강(AHSS)을 차체에 적용했으며, 2020년 이후에는 거의 모든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AHSS를 주요 구조 부위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AHSS는 차량 주요 구조 부위에 적용돼 중량을 2539% 줄이고, 수명 주기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을 34.5톤 줄이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장조사 기관 그랜드뷰리서치는 글로벌 AHSS 시장이 2023년 169억달러에서 2030년 254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전체의 약 47%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유럽 볼보의 사례는 고부가 철강 전략의 상징입니다. 볼보 XC90 2세대 모델은 열성형 보론강(22MnB5)을 승객 보호용 골격 구조에 적용해 차체 무게를 줄이면서도 충돌 안전성을 높였습니다. 후방 프레임에는 고온 성형(핫스탬핑) 공법 기술을 활용해 전체 차량 무게를 약 20% 줄이는 성과를 냈습니다. 
 
정부 주도 혁신…성장 곡선 ‘리셋’
 
지난 10여년간 한국산업의 고부가가치 전환이 더뎠던 배경에는 ‘민간 주도’ 중심의 접근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규제 완화와 민간 자율이 강조됐지만, 기초 연구개발(R&D)은 수익성이 낮고 위험이 큰 영역이어서 민간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한국의 산업화 초기, 석유화학과 철강 등의 산업은 공기업과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포스코와 여수 석유화학단지 등이 국가 주도로 세워지며 기반 산업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첨단산업과 공학자들. (사진=픽사베이)
 
미국의 첨단산업 성장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됩니다. 국방부와 연방정부 연구기관이 기초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민간 기업이 상용화하는 구조가 산업 성장의 뿌리가 됐습니다. 미국에서 석유와 철강이 버려지지 않고 ‘구조조정과 업그레이드’를 거쳐온 것처럼, 기후위기 시대에는 친환경·저탄소 전환을 위해 정책적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새로운 산업은 원래 공기업과 산업단지 조성 같은 국가 주도로 태어난다”며 “목표를 설정하고 연구개발·산업·금융을 패키지로 지원해야 민간이 뒤따를 수 있다”고 밝습니다. 기초 기술 개발은 국책 연구소와 공공 재원이 책임지고 벤처와 스타트업은 민간 자본과 국가 모태펀드를 기반으로 초기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공공 부문이 단순 지원자가 아니라 혁신을 주도하는 ‘적극적 투자자’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주카토의 2018년 저서 『미션 이코노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주카토는 ‘미션 오리엔티드(mission-oriented)’ 산업정책의 개념을 제시하며, 미국의 아폴로 달 탐사 프로젝트를 사례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정부의 역할이 단순한 자금 지원에 그칠 게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개입할 때 혁신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설명입니다. 
 
한국경제의 성장 곡선은 다시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산업화와 첨단 제조라는 두 차례의 S-커브를 거쳐, 2040년까지 1인당 GDP 7만달러 시대를 열 제3의 S-커브가 필요한 것으로 전망됩니다. ‘S-커브’란 한 산업이나 기술이 도입기를 지나 급성장하다가 일정 시점 이후 성숙기에 접어들며 성장세가 둔화되는 과정을 ‘S자 곡선’으로 형상화한 개념입니다. 기존 곡선이 정체될 때 새로운 기술과 산업으로 전환해야 다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은 서비스업이 클 수 없는 구조에서 제조업 의존이 심화됐다”며 “신흥시장 개척과 인공지능 등의 고부가가치 신산업으로 빠르게 옮겨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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