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 양대 패권국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미국은 과감히 기존 질서를 허물고 새판을 짜는 ‘리셋’을 선택했고, 중국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양으로 승부하는 ‘올인’을 밀어붙였습니다. 두 초강대국의 선택은 전혀 다른 길을 만들어냈습니다. 리셋은 첨단산업의 압도적 우위를, 올인은 과잉과 감산의 늪을 남겼습니다. 이제 중국도 미국의 리셋 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저성장 시대, G2의 선택은 한국 산업이 가야 할 길을 묻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사진=픽사베이)
미, 제조업 덜고 ‘반도체·바이오’ 육성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전통 제조업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고비용·저효율 산업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제너럴모터스(GM)는 파산보호 신청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고용 유지만을 위해 연명자금을 쏟아붓지 않았습니다.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리셋’을 선택한 것입니다.
과감한 정리 후 선택과 집중이 뒤따랐습니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직후 ‘미국 재투자 및 회복법(ARRA)’을 통해 대규모 경기 부양과 산업구조 전환에 나섰습니다. 투입한 재정만 약 7870억달러 규모(1062조원)로, 당시 미국 GDP의 약 5.5% 수준입니다. 한국도 2008~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28조9000억원(당시 GDP의 약 3% 수준) 규모 재정을 투입했지만 SOC 투자, 일자리 유지가 중심인 ‘단기적 경기 대응’ 성격이 강했습니다. 미국처럼 ‘산업구조 전환’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던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파산 기업을 정리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을 반도체·바이오·IT 서비스 등 차세대 산업에 투입했습니다. 단순한 회생 지원이 아니라 ‘산업 체질 개선’을 겨냥한 전략적 투자였습니다.
그 결과 2018년 기준 미국의 반도체 설계(팹리스) 시장 점유율은 68%로 압도적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파운드리 생산에서는 대만과 한국이 강세지만, 표준을 정하고 설계를 주도하는 ‘두뇌’ 역할은 여전히 미국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바이오 분야 역시 신약 파이프라인 수에서 세계 최정상을 차지했습니다. 고비용 구조 산업을 덜어내고 첨단산업에 힘을 싣는 ‘미국식 리셋’이 만들어낸 성적표입니다.
엔비디아(NVIDIA) 로고가 표시된 스마트폰이 컴퓨터 메인보드 위에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로이터)
미국의 리셋은 제조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 셰일혁명은 에너지 가격 구조 자체를 바꾸며 제조업 원가 절감 효과를 낳았습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 원유·가스 생산량은 2010년대 이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이는 제조업 경쟁력 회복의 토대가 됐습니다.
공급망 재편도 주효했습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칩스법’을 통해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산업을 자국 내로 끌어들였습니다. 동시에 무역확장법 232조(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 301조(중국산 보복관세)를 무기 삼아 해외 의존도를 줄이며 자국내 투자와 고용 강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덜어내고, 재편하고, 국내로 끌어오는 미국식 리셋은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중, 에틸렌·폴리실리콘 ‘과잉’의 부메랑
중국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석유화학·철강·배터리·태양광 등 전 영역에서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대규모 생산 확대에 나섰습니다. ‘수요는 결국 따라올 것’이라는 계산 아래 ‘몰아주기식 투자’가 이어졌습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범용 제품 시장을 저가 공세로 휩쓸며 글로벌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부메랑은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IMF에 따르면 2010년 10.6%였던 중국의 성장률은 2024년 4.6%로 추락했습니다. 내년 중국 성장률은 4.5%로 예측됩니다. 과잉 공급은 기업 도산으로 이어졌고, 정부 보조금조차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습니다.
양적 확장이 한계에 다다르자 중국 정부는 ‘감산’을 공식 언급했습니다. 중국의 공급과잉은 에틸렌과 폴리실리콘에서 두드러집니다. 중국석유화공집단공사(Sinopec)에 따르면 2028년까지 에틸렌 총 생산능력은 1억톤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윤재성 하나증권 연구원은 “중국의 정유·석유화학 구조조정 관련 문건이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라며 “9월 중 국무원의 구체적인 과잉생산 축소 방안으로 에틸렌 설비는 2026년부터 신규 허가 제한, 정유 또한 연간 생산량 200만톤 이하 설비에 대해 폐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습니다.
중국 간쑤성 둔황의 용융염(molten salt) 태양열 발전소. (사진=뉴시스)
태양광 핵심 소재인 폴리실리콘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상위 6개 업체는 2025년 약 500억위안(9조35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과잉 설비와 재고를 매입, 최소 연간 100만톤(약 31%)을 감축할 계획입니다. 이미 다수의 업체가 원가 이하 판매로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일부는 가동률이 30%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중국 정부가 ‘가격 질서 바로잡기’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의 감산과 구조조정 신호는 분명하지만, 실행 속도는 미지수입니다. 국유·민영 거대 설비가 얽혀 있어 정치·고용 변수가 걸려 있어서입니다. 중국은 손익이 악화하는 와중에도 신규 프로젝트가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석탄을 화학으로 전환하는 대형 설비도 가동 중입니다. 과잉을 줄여야 한다는 인식은 퍼졌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실질적인 축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미국은 과감히 덜어내고 새로운 판을 짜며 ‘고부가·현지화’로 기준을 끌어올렸습니다. 중국은 양적 확장으로 몰아붙이다가 결국 감산과 질적 보정의 길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초기 선택은 달랐지만 결론은 수렴되고 있습니다. 양적 경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석유화학과 철강은 중국의 저가 물량에 치이고, 전기차·배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습니다. 서비스업은 성장판이 막혔고, 내수는 협소합니다. 한국이 주저하는 사이, 산업 패권의 무대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