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업의 ‘생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습니다. 반세기 동안 지탱해온 주력 품목은 흔들리고, 글로벌 판도가 급변하면서 ‘양적 성장’의 환상은 깨지고 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기획기사를 통해 구조조정의 파고 속 한국 산업의 생존 전략을 짚어봅니다._편집자 |
[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한국 산업의 ‘성장 시계’가 멈춰 서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반도체,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등이 경제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위기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위기는 늘 반복돼왔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수요 둔화에 중국과 중동의 저원가 전략에 미국의 고율 관세 등 외부 압력이 겹치면서 한국 산업의 경쟁력은 전례 없이 급격히 약화됐습니다. 정부 주도로 시작된 석유화학·철강 구조조정을 한 업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산업 전반의 재편을 요구하는 신호탄으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천 연수구 인천신항 터미널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석화·철강…다음은 디스플레이?
20년 동안 한국 산업의 ‘주력 얼굴’은 거의 그대로입니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의 분석에 따르면, 2005년과 2025년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과 기업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수출을 견인해온 전통적 주력 산업으로는 반도체·자동차·선박·무선통신기기·석유제품 등이 꼽힙니다. 이들은 지난 1970년대 이전 섬유·경공업 위주에서 1980년대 이후 중후장대 산업으로 전환되는 시기부터 주력 산업으로 틀을 잡았습니다.
문제는 한국이 반세기 가까이 같은 품목에 의존해 온 사이, 세계 산업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범용 물량 공세와 중동의 초저가 전략이 동시에 밀려들었습니다. 직격탄을 맞은 곳은 석유화학과 철강입니다.
석유화학산업은 추락의 선두에 섰습니다. 중국과 중동이 앞다퉈 증설에 나선 가운데 수요까지 감소하면서 범용 제품의 마진은 최근 몇 년 사이 곤두박질쳤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수출 통로는 갈수록 좁아졌고, ‘다운사이클 장기화’라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철강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철강 시장은 이미 ‘양의 시대’를 끝내고 치열한 단가 인하 경쟁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중국은 2024년 9년 만에 최대치에 가까운 철강 수출을 쏟아냈습니다. 미국은 지난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해 도입한 관세(25%)를, 올해 6월 50%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석화와 철강 이후 구조조정 사정권에 ‘디스플레이’가 들어섰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한국 디스플레이는 OLED 분야에서 2004년 이후 17년간 세계 1위 지위를 유지해왔지만, 중국의 본격적인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 속에 점차 압박을 받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BOE는 90억달러 규모 OLED 공장을 중국 청두에 건설 중이며, 저가 공세로 한국 시장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카운터포인트 리서치는 “2023년 기준 68%였던 중국의 디스플레이 생산능력 점유율이 2028년에는 7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9일 서울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업계에서는 “이미 LG를 중심으로 사실상 디스플레이도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며 정부 개입도 시간문제”라는 진단이 나옵니다. 정부는 지난 7월 2032년까지 i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에 484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산업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 신호’로 해석됩니다.
자동차산업도 전기차 전환이라는 구조적 변화로 내연기관 중심의 부품 산업이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전통 제조업이 아닌 첨단산업이지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에 접어든 2차전지 분야 역시 위기 징후가 뚜렷합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명박정부부터 박근혜정부까지 제조업 위기가 시작됐다"며 "지난 10년간 새 산업이 등장하기는커녕 기존 산업마저 어려워지고 조선만 최근 살아나는 정도”라고 짚었습니다.
내수 못 버티는 ‘수출 의존’ 숙명
내수시장이 작은 한국은 수십 년간 ‘주력 품목 중심’ 수출 구조에 안주했습니다. 산업 다변화나 혁신보다는 수출 확대가 우선이었습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GDP 대비 재화·서비스 수출액 비중은 ‘44.4%’로 선진국 중 상위권입니다. 미국이 11%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로, 대외 충격이 강하게 전이되는 구조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산업은 생산을 여러 나라가 나눠 맡는 ‘분절된 가치사슬’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소재·부품·조립 등이 각국으로 흩어지는 구조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한국은 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주로 중간 부품이나 조립을 담당하는 위치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은 하부 공급망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어 구조적 취약성이 노출됩니다. 원재료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핵심 장비는 미국에서 들여오고, 조립만 한국에서 이뤄지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야적장에 철강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문제는 중국이 자국 내 원재료·부품·장비 국산화율을 높이고, 동시에 조립·완제품 생산까지 통합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중간재 조립’이라는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단계만 담당할 경우, 중국이 이마저도 자체적으로 흡수하면 한국 산업이 설 자리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중국 의존도를 키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중국 의존도는 19.2%이며 여전히 단일 최대 시장 축에 속합니다. 대중 수출 의존도는 하락하는 추세이지만 대체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중국 의존을 줄이며 새로 택한 탈출구는 미국 시장이었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대미 수출함수 추정과 시사점(2025)’에 따르면 2020년 14.5%였던 대미 수출 비중은 2024년 18.7%로 상승했습니다. 같은 기간 수출액도 741억달러에서 1278억달러로 연평균 약 14.5%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길 찾기’에 나섰지만 맞닥뜨린 것은 ‘트럼프 라운드’입니다. 미국은 올해 철강·알루미늄 등 고율 관세를 확대했고, 미 행정부는 관세 합법성 공방 속에서도 “필요시 거래 재조정”을 시사하며 통상 압박을 높이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미국의 대한국 무역수지 적자는 699억달러로, 2021년보다 369억달러 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의 대미 수출 확대가 오히려 ‘통상 압박의 빌미’라는 역설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한국의 주요 산업은 양적 성장의 한계, 글로벌 경쟁 압박, 수출 중심이라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며 “단순한 업종 조정이 아닌 한국 산업 전반의 생존 전략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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