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법 개정 수위가 높아지면서 일부 기업들이 꼼수를 벌이기 시작했다. 태광산업은 자사주 소각이 강제될 것을 우려해 자사주를 볼모로 교환사채(EB) 발행을 결정했다. 이에 태광산업에 투자 중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이 EB 발행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자, 태광산업은 사모펀드 때문에 신사업 추진에 문제가 생겼다며 트러스톤자산운용을 사모펀드라고 지칭했다.
우리나라에서 사모펀드에 씌워진 이미지는 약탈자본, 투기자본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모펀드는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모집한 공모펀드의 상대적 개념일 뿐 투기자본의 집합체가 아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투자 대가들도 대부분 사모펀드로 투자한다. 워렌 버핏이 사모펀드로 한국 기업 주식을 매수해 경영진 꼼수에 제동을 걸었다면 이걸 경영권 침탈 행위, 약탈자본의 공격이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사모펀드를 악마화해 경영권 분쟁에 이용한 사례는 또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고려아연과 영풍의 다툼이다. 고려아연 지분을 두고 벌어진 다툼은 엄연히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영풍 간의 싸움이다. 여기에 양측의 우군들이 각각을 지원하고 있다. 26.28% 지분을 가진 영풍(와이피씨)이 최 회장 지분율을 크게 앞서지만, 최 회장에겐 든든한 우군이 있다. 투자자로 영풍 편에 선 MBK파트너스(한국기업투자홀딩스)는 8.37% 지분을 갖고 있다.
지분율이든 경영권을 누가 행사할지로 보든 이 분쟁은 엄연히 ‘최 회장 대 영풍’ 싸움인데, 고려아연과 언론은 이를 ‘고려아연 대 MBK’ 구도로 만들었다. 약탈자본이 국내 기간산업의 경영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프레임이다. 때마침 MBK는 홈플러스로 국민적 욕받이가 돼 이 프레이밍은 효과를 발휘했다.
MBK가 중국 자본이란 말까지 퍼졌다. MBK 발표를 참고하면, MBK의 지분은 윤종하 부회장과 김광일 부회장이 각각 24.7%, 우리사주조합이 17.4%, 김병주 회장은 17%를 갖고 있다. 나머지 16.2%는 미국 사모펀드 다이얼캐피탈이 보유 중이다. 김 회장이 골드만삭스, 살로먼스미스바니, 칼라일 등 월가 투자은행에서 근무한 미국 시민권자이고 미국 사모펀드도 참여했으니, 차라리 미국 자본의 약탈이라고 하면 이해할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지로 판가름하는 게 아니다.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이 판단 기준이다. 기업이 불법, 탈법, 편법적인 일을 벌였다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주체가 사모펀드이든 소액주주든 워런 버핏이 됐든 진짜 약탈자본이든, 그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가게에 CCTV를 다는 목적은 고객의 사생활 침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둑을 잡기 위해서다. 집중투표제 하자니까 또 경영권을 들먹인다. 집중투표제로 경영진이 원치 않는 이사가 선임된들 전체 이사회 구성에선 소수이다. 해당 이사가 특정 안건을 단독으로 통과시키거나 부결시키지 못한다. 오직 이사회 내부의 부조리, 비이성적 결정 등을 전체 주주에게 전할 수 있을 뿐이다.
사안을 비틀어 상대에게 악한 이미지를 씌우려는 의도적 행위가 성행한다. 대주주의 불법, 탈법을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려는 일반주주들의 노력을 경영권 침탈이란 프레임으로 이미지화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프레임의 바깥을 보지 못하면 불공정한 자본시장에 계속 갇혀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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