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앞에서 흔히 하는 ‘무심코 군것질’의 원인은 식사 기억의 약화로 인한 것이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뇌 속에 '밥 먹은 기억'을 저장하는 특별한 세포가 존재한다? 실제로 그런 세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미국 남가주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와 펜실베이니아대 공동 연구팀은 뇌 해마 속에서 ‘식사 기억’을 저장하는 특수 신경세포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지난 11일 밝혔습니다. 이 신경세포는 식사 시간과 내용, 장소 등 복합적 식사 정보를 인식·기억하며, 이 기억이 손상될 경우 과식 위험이 크게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Nature Communications에 실렸습니다. 이 논문은 단순한 배고픔이 위장의 반응만이 아닌, 뇌 기억 회로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
해마 속 ‘식사 엔그램’, 비만과 식사장애 열쇠
이번 연구의 핵심은 '엔그램(engram)'이라는 개념입니다. 엔그램은 뇌에 저장된 기억의 생물학적 흔적으로, 특정 자극이나 경험이 뉴런 간의 연결을 형성할 때 만들어집니다. 연구팀은 이 엔그램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를 포함하는 식사 관련 기억도 저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식사 중에 해마의 특정 영역, 특히 배측 해마(dorsal hippocampus)의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며 식사 엔그램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엔그램은 기억이 뇌에 남기는 물리적 흔적이다. 식사 엔그램은 식사 장소나 식사 시간 등 다양한 정보를 저장하는 복잡한 생물학적 데이터베이스처럼 기능한다”라고 남가주대 스콧 카노스키(Scott Kanoski) 교수는 설명합니다.
이 세포들이 손상되거나 비활성화될 경우, 실험 쥐는 방금 전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음식을 찾고 과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반대로, 이 세포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 식사에 대한 기억이 유지돼 음식 섭취가 자제되었습니다.
TV 보며 먹으면 식사 기억이 흐려진다
연구진은 ‘주의력’이 이 기억 형성 과정에 핵심 역할을 한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며 식사하거나 TV를 시청하는 등, 주의가 분산될 경우 식사 엔그램이 제대로 저장되지 않으며, 이는 식후 포만감을 뇌가 인식하지 못하게 해 추가 섭취로 이어집니다. 이는 흔히 ‘무심코 군것질’을 반복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연구의 제1저자인 남가주대 레아 데카리-스페인(Lea Decarie-Spain) 박사는 “뇌가 식사 경험을 정교하게 인코딩하는 순간이 있는데, 주의가 다른 데로 향하면 이 순간이 손상된다”라며 “결과적으로 식사 기억이 약해지고, 포만감 대신 공복감이 남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ChatGPT로 그린 해마 속 ‘식사 엔그램’ 개념도
식사 기억 세포 없애자 음식 위치 기억 못해
흥미로운 것은 식사 기억을 담당하는 이 해마 신경세포가 일반 공간 기억이나 환경 기억을 담당하는 뉴런과는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연구진은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이 식사 기억 세포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한 결과, 실험 쥐는 음식이 놓인 장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일반적인 미로 기억은 유지했습니다. 이는 뇌 속에 '식사 전용 기억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들 신경세포는 해마뿐 아니라 식욕과 배고픔을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진 측좌하부 시상하부(lateral hypothalamus)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 연결 고리를 차단하자, 쥐는 식사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음식을 탐색했습니다.
뇌-식사-행동의 삼각 구조…“비만 치료, 식사 기억 강화로 접근할 수도”
이 발견은 비만 관리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큽니다. 연구를 총괄한 스콧 카노스키(Scott Kanoski) 교수는 “현재 대부분의 비만 치료 전략은 칼로리 제한이나 운동 처방에만 의존하고 있다”며 “그러나 식사 기억을 명확하게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뇌의 기능을 강화하는 접근도 체중 관리에서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식사 엔그램의 존재는 치매 환자, 뇌 손상 환자, 기억 장애 환자들이 왜 과식을 반복하는지에 대한 신경생물학적 설명도 제공합니다. 특히 알츠하이머병과 식사 기억의 상관관계 연구가 진행될 경우, 향후 식이 행동과 인지 기능 개선을 동시에 겨냥한 치료법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뇌-식사-행동의 삼각 구조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먹느냐’만큼이나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뇌가 어떻게 식사 경험을 해석하는지가 과식 여부를 결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식사 시간과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건강한 식습관을 위해 음식 선택 자체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카노스키 교수의 말은 상당히 시사적입니다.
비만은 단순한 식욕의 문제가 아니며, 뇌의 기억 회로가 무너질 때 식탁 위 조절력도 함께 사라진다는 발견이 비만 치료의 새 장을 열어주길 기대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